2차 암흑기
대학 생활 6년 동안 내 스스로 내 수명을 깎는 일에 질려버린 터라 워라밸(그 때는 워라밸이라는 말이 없었지만)을 실현할 수 있을 것 같은 업종의 회사로 입사했다. 상황이 달라질 거라 생각했다.
상황이 달라진 건 사실이었지만 여전히 읽고 쓰기는 어려웠다. 일이 덜 고된 대신 사람들 간의 관계를 원만하게 유지하는 일이 너무 어려웠다. 일이 한가해 시간이 남아 돌아서 그런지 매사 뒷말도 무성하고 같잖은 일로 괴롭힘도 심했다. 기본적으로 뭔가를 '읽는다'는 일은 '남의 이야기를 듣는' 일인데 내 마음이 지옥이 되면서 남의 이야기를 듣기는 커녕 관심을 가질 여유도 사라져 버렸다.
사람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나는 읽고 쓰기가 선순환을 이뤄야 그 싸이클이 돌아가는 사람이다. 책을 읽고 뭔가 인풋이 있어야 글로 아웃풋을 낼 수 있는데 인풋이 끊기면서 아웃풋도 끊겨버렸고 아웃풋이 끊기자 마음에 돌을 얹어놓은 듯 가슴이 터질 것 같은 나날이 이어지며 뭔가를 읽기는 점점 더 힘들어져갔다.
당장 필요한 실용적 지식을 쌓고 돈을 버는데 도움이 되는, 혹은 진급 시험에 필요한 그런 책은 몇 권 (강제로) 읽었지만 내가 진정으로 읽고 싶은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끝내 나는 견뎌내지 못했다. 내 마음의 평화는 결국 그 조직을 떠난 후에야 되찾을 수 있었다. 그 때부터 조금씩 다시 읽고 쓸 수 있게 되었다.
행복한 사람은 글을 쓰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너무 행복한 사람은 내 행복에 겨워 남의 이야기에 관심을 가질 틈이 없다. 집 밖으로 뛰쳐나가 친구들과 깔깔대기만 하기에도 하루가 짧은데, 혼자 방구석에 들어앉아 뭔가를 읽고 쓴다는게 가당키나 한 얘기인가. 결국 무언가를 읽고 쓰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결핍과 우울감이 필요한데 또 너무 괴로운 사람은 본인 내면의 슬픔에 잠겨 죽기 직전이라 남의 이야기까지 신경 쓸 여력이 안된다. 어느 정도 괴롭기는 해도 당장 죽을 것 같지는 않은 상태여야 남의 글도 읽을 수 있고 내 글도 쓸 수 있는게 아닐까 싶다.
그런데 읽고 쓰는 일에는 생각보다 강력한 치유 효과가 있어서 슬픔을 끌어 안고 시작했을지라도 끝내는 읽고 쓰는 행위 덕분에 그 슬픔을 극복하게 된다. 슬픔을 극복한 뒤에는 도리어 글을 쓸 수 없어졌다며 끙끙대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그 때는 나의 슬픔이 아니라 이웃의 슬픔이나 시대의 슬픔에 대해 돌아볼 수 있으니 역시 계속 더 써나갈 수 있다.
더 좋은 것은 이쯤 되면 아예 방향을 틀어 즐거움에 대해 쓸 수도 있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슬픔이 묻어나는 글만이 좋은 글이라고 절대 생각하지 않는다. 글을 쓰기 위해 의도적으로 계속 슬픔에 잠겨 살아야한다면, 그걸 건전한 취미라고 하기도 어렵거니와 오랜 기간 계속하기는 더욱 힘들다. 설령 읽고 쓰는 일이 취미가 아니라 생업이라 할지라도 마찬가지다.
취미 생활을 누리며 행복한 것이 베스트.
만약 취미와 행복 중 선택해야한다면 당연히 행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