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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예 Jun 11. 2020

무시당해 마땅한 책은 없다

전 '그런 책'은 안봐요

'책'이라는 개념만큼 명확하면서도 모호한 것도 없어서 누군가 책을 읽는다고 하면 대체 무엇을 읽는지가 슬금슬금 궁금해진다. 책에는 (일단 문학만 생각해보면) 소설도 있고 시도 있고 에세이도 있다. 소설 하나만 봐도 현대소설과 고전소설로 나눌 수도 있고 장편과 단편으로 나눌 수도 있고 장르에 따라 추리소설, 연애소설, 전쟁소설, 역사소설 등으로 구분할 수도 있다. 한국소설과 영미소설로 나누는 것도 당연히 가능하다. 비문학의 세계는 일일히 열거할 수 없을 만큼 더 버라이어티하다.


일반적으로 '책을 읽는다'는 행위가 책들의 스펙트럼을 모두 섭렵한다는 말과 동급으로 통하지는 않는다. 보통은 자기 취향에 맞는 책 위주로 편식을 하게 되는데, 이런 편식이 좋다, 나쁘다에 대해서도 의견은 분분하다. 개인적으론 편식을 한다고 해도 평생 읽을 책이 부족할 일은 없을테니 굳이 스트레스 받아가며 '이젠 슬슬 다른 책도 봐야하는데'하는 압박을 느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이건 내 생각일 뿐이니 판단은 각자에게 맡길 수 밖에. 다른 세계의 문을 열지 말지는 오롯이 개인의 선택이다.


하지만 책 좀 읽는다는 사람들 사이에서조차 상대적으로 천대받는 분야가 있다는 느낌은 분명히 있다. 시와 소설에 비해 에세이가 그렇고, 문학에 비해서는 비문학이 특히 그렇다. ‘창작의 고통’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 창작이 어려운 일임은 다들 인정하는 분위기인데 ‘창작’은 왠지 픽션과 통하는 말처럼 들린다. '이런 캐릭터와 이런 플롯을 생각해내다니! 이 작가 진짜 천재 아냐?'랄까. 그에 반해 에세이나 비문학은 픽션을 바탕으로 하지 않기 때문에 별 고통 없이 술술 쓰일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비문학은 일종의 논문이라 볼 수도 있어 누군가의 인생을 좀 먹은 결과물인 경우도 많다. 이 경우는 창작의 고통보다도 연구의 고통이라 하면 적절할까. 정말이지 비문학이야말로 아무나 쓸 수 없는 책이라 할 수 있다. 가끔 책을 읽다 보면 그 저자를 존경하게 되는 일이 생기곤 하는데 내 경우는 비문학에서 그런 감정을 많이 느꼈다. 목숨을 걸고, 가족과 일상도 포기한 채 평생을 바쳐 진행한 조사와 연구가 비로소 한 권의 책이 되었을 때, 저자의 기분은 대체 어땠을까? 그 정도 학구열을 품어본 적이 없는 나 따위는 상상조차 가지 않는다.


에세이는 또 어떠한가. 그 글이 나오기까지 한 사람이 실제로 경험하고 배우고 느낀 것들을 그저 '순수 창작'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폄하할 수 있을까? 때때로 인생은 소설보다 더 극적이고 허구보다 더 가혹한데 말이다. 혹자는 에세이가 독자에게 어떻게든 뭐라도 교훈을 주려고 해서 반감이 든다고 하기도 했는데 (그런 에세이가 없다곤 할 수 없겠지만) 에세이의 특성은 '다양성'이니 그렇지 않은 에세이를 찾으면 생각은 또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몇몇 현학적인 에세이들로 인해 받은 부정적인 감정 때문에 '에세이' 전체에 대해 마음을 닫아버린다면 너무 아깝지 않은가.


책을 쓰고 팔고 홍보하다보면, (그리고 때론 그런 목적 없이도) 책 좋아한다는 사람들을 만날 기회가 생길 때가 종종 있다. 그리고 그런 기회와 맞닥뜨렸을 때, 전 문학만 읽어요, 전 고전만 봐요, '그런 책'은 안 봐요. 하는 사람들을 심심찮게 만날 수 있다. 읽어 보지도 않고 '그런 책'은 안 봐요 라니, 대체 '그런 책'이 뭔가요? 그럼 '그런 책'을 읽는 사람들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런 책'을 쓴 사람에 대해서는요? 하고 묻고 싶을 때도 많지만 속으로만 삼킬 뿐.


아이러니한 것은 왠지 있어 보이고 어렵다는 평이 따라 붙는 책을 주로 읽는 이들, '그런 책'은 안봐요, 라고 하는 이들이 책 관련 인플루언서인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내가 쉬이 도전하기 힘든 책을 대신 읽어주고 있다는 점에 많은 이들이 대리 만족을 느껴서 그런 것인지,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책이든 명품이든 SNS의 본질은 '쇼잉'이니 쉬워 보이는 책을 읽는다는 것이 내 독서 수준이나 사유의 깊이를 깎아먹는 일처럼 비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얼핏 들긴 하지만 한 사람의 저자로서, 또 한 사람의 독자로서 저런 이야기를 들으면 맥이 풀리는 것도 사실이다.


편식은 개인의 자유지만 타인의 취향을 깔아뭉개는 일은 부디 삼가주기를. 세상의 모든 책에는 고통이 스며있고, 무시당해 마땅한 책은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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