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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예 Jan 19. 2017

현지인의 favorite place

나는 내가 아픈 줄도 모르고 #19

차를 빌릴 때 렌트카 업체 직원이 자꾸 어디로 가냐고 물었었다. 리스본 시내를 돌아볼거냐 아니면 외곽으로 나가느냐를 묻더니 나중엔 ‘그러니까 정확히 어디를 가는거냐’고 물어와 우리를 당황시켰다. 왜 이러나 싶긴 했지만 굳이 숨길 사안은 아니어서 중부 지역으로 수도원 투어를 간다. 알코바사, 바탈랴, 투마르를 돌아볼 것이다 하고 대답했더니 갑자기 커다란 지도를 펼치며 ‘여기’에 꼭 가보라고 강력 추천을 한다. 자기의 favorite place란다. 중세의 모습을 볼 수 있는 멋진 성이 있는 곳이니 실망하지 않을 거라며 꼭 들러보라고, 너희가 원래 가려고 하는 곳들과도 매우 가깝다며 혹시라도 못 알아들을까 몇 번이나 반복해서 자꾸 얘기했다. 그 곳은 레이리아였다.


날이 밝았으니 예정대로 투마르의 크리스투 수도원으로 가야할 때가 되었다. 대신 가는 길에 레이리아에도 잠시 들러보기로 했다. 현지인이 자기의 favorite place라는 말까지 꺼내며 꼬시니 별 수 있나. 반쯤은 속아주는 셈 치고 차를 몰았다.


난 요즘 유행하는 무계획 여행은 좋아하지 않는다. 비행기표만 달랑 들고 떠나는 여행이 대세인 것 같긴 하지만 그건 도무지 내 취향과는 맞지 않는다. 대신 어느 정도 계획을 세우되 그 계획을 모두 지키려고 조바심을 내지는 않는, 그런 여행이 좋다. 여행을 하면서 내가 세운 계획이 상황에 따라 조금씩 바뀌는 것과 그 사이사이에 생겨나는 사건들을 처리하는 과정은 겪을수록 무척 재미있다. 계획이 아예 없다면, 모든 것이 백지라면 그런 재미를 느낄 수가 없으니까. 레이리아에 가게 된 것도 미리 세워둔 계획 사이에 생겨난 일종의 깜짝 선물 같은 느낌이어서 더욱 좋았다.

 

성은 마을 한가운데, 산 꼭대기에 위치하고 있어 찾기도 쉽고 전망도 무척 좋았다. 하지만 성 자체는 그동안 겪은 세월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완전히 파손되어있었다. 특히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진 성 안의 예배당은 어제 만났던, 그리고 너무나도 멀쩡했던 두 수도원과 비교되어 더 엉망으로 느껴졌다. 예배당이라고 알려주지 않았다면 뭐하는 공간인지 알아보지도 못할 수준이다.하지만 손상된 곳에서만 느낄 수 있는 분위기란 것도 분명히 있다. 그럴싸하게 보존되고 복원된 공간에서 느낄 수 있는 것과는 조금 다르지만 이쪽도 충분히 운치 있었다.


시간의 터널을 통과하다보면 고스란히 그 흔적이 남는다. 어쩌다보니 애고 어른이고간에 “동안이시네요”가 최고의 칭찬이 되어버렸지만, 사실 나이에 맞는 얼굴을 가지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그건 사람도 물건도 건물도 마찬가지다. 세월의 풍파를 비겁하게 피하지 않았음을 제대로 보여주는 레이리아 성. 성은 부서진 모습 그대로 충분히 멋져보였다.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빼곡한 집들. 세월이 흐른 만큼 이제는 아파트를 닮은 네모반듯한 높은 빌딩도 있긴 하지만 발코니에서 보이는 마을의 풍경은 여전히 낭만적이다. 이런 풍경을 만날 수 있게 해준 그 직원에게 뒤늦게 고마웠다.


레이리아 성은 14세기엔 동 디니스 왕과 그의 아내인 이자벨의 거처로 사용되기도 했다고 한다. 디니스 왕보다는 이자벨에 대한 이야기가 더 인상적인데, 그건 그녀가 포르투갈의 성인 중 한 사람으로 꼽히기 때문이다. 이자벨은 왕실의 부엌에서 남은 음식을 챙겨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곤 했는데 왕비가 부엌에서 음식을 훔친다는 사실에 화가 난 왕이 왕비의 앞치마에 무엇이 들었는지 확인해야겠다고 다그쳤다고 한다. 하지만 왕비의 앞치마에는 장미 꽃잎만 가득할 뿐 음식은 없었다고. 이 이야기 덕분에 지금도 이자벨은 장미를 들고 있거나 옷 위로 장미 꽃잎들이 떨어지는 모습으로 묘사되곤 한다.

레이리아 성에서 구매한 마그넷


레이리아에서의 선물 같은 시간을 마무리하고 원래 계획대로 투마르의 크리스투 수도원으로 향했다.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포르투갈 중부 수도원 세 곳 중 마지막으로 남은 한 곳이다. 오늘은 맥주 대신 초코 우유 한 병 때리고!



덧붙이는 말

1. “스페인 여행을 하면서 잠시 찍고 가는 곳” 정도로만 알려진 포르투갈에서 오래도록 머무르며 여행한 이야기를 전합니다.

2. 매거진 제목은 가토 다이조 著, <나는 내가 아픈 줄도 모르고>에서 인용하였습니다.

3. 이 이야기는 저의 개인 블로그에 있는 글들을 바탕으로 하기도 하고 안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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