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예 Jan 20. 2017

마누엘리노의 창문을 바라보며

나는 내가 아픈 줄도 모르고 #20

“독실한 신자세요? 수도원 다 비슷비슷해서 한군데만 가보면 될텐데.. 굳이 다 갈 필요 없어요” 라는 말을 얼핏 들었지만 그 말이 무색할 정도로 세 수도원은 제각각이었다. 말마따나 수도원이란게 다 비슷비슷할 법도 한데 셋 다 개성이 넘치니 한 군데도 포기할 수가 없었다. 

세 군데를 모두 돌아볼 거라면 통합권이 핵 이득이다


투마르의 크리스투 수도원은 템플 기사단의 본부로 사용된 곳이다. 템플 기사단은 무어인들로부터 성지를 찾는 순례자들을 보호하는 일을 했다. 그래서일까, 이곳은 여지껏 만났던 수도원들과는 달리 좀더 두툼한 성채의 느낌이 강했다. 


크리스투 수도원에서 눈여겨 보아야할 것은 건축 양식 중 하나인 마누엘(혹은 마누엘리노) 양식이라고 한다. 마누엘 양식은 포르투갈의 문장, 꼬인 밧줄, 혼천의, 십자가, 덩굴 식물 등을 모티브로 한 매우 화려한 장식 양식을 뜻한다. 당시 왕이었던 마누엘 1세의 이름을 따 붙여진 이름이라고. 바스코 다 가마가 인도에 도착해 향신료 무역의 길을 열고, 페드루 알바레스 카브랄이 브라질에 닿은게 마누엘 1세 때다. 한마디로 포르투갈이 가장 잘 나가던 시절이었던 셈이다. 이에 마누엘 1세는 화려한 건축물들을 통해 전 세계에 그리스도교를 전파하고 포르투갈의 힘을 과시하고자 했던 것 같다. 


수도원에서 마누엘 양식을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은 역시나 이 커다란 창문이다. 가장 상단 중앙에 달린 십자가와 그 바로 아래엔 포르투갈의 문장이, 양 옆엔 혼천의가 보인다. 복잡하게 꼬인 밧줄과 매듭 장식들 또한 엄청나게 화려하다. 실용성만을 따진다면 굳이 이렇게 화려하게 창문을 만들 필요는 없었겠지만, 꼭 실용성만이 전부인 것은 아니니까. 그 시절의 상징이 가득한 창문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마치 이 창문이 우리를 그 때 그 시절로 데려다줄 것만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화려한 장식을 뒤덮은 이끼들은 단순한 초록색을 넘어선, 오묘한 빛깔을 띄고있어 보는 재미를 더했다. 마치 오래된 창틀에 노르스름한 녹이 슨 것 같아 한번 더 흘러가버린 그때 그 시절을 실감케 했다.


수도원엔 여러 회랑이 있는데 목욕의 회랑, 빵의 회랑, 묘지의 회랑 등 이름도 제각각인데다가 회랑마다 건축 양식이 달라 조금은 산만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그 중에서도 르네상스 양식의 깔끔한 회랑은 마누엘 양식의 화려함과 대조를 이뤄 유독 세련된 분위기를 자아냈다. 중앙의 분수는 지하 수로와 연결되어있어 물이 끊기지않는다고 한다. 

 


크리스투 수도원엔 마누엘 양식 외에는 볼 것이 없는거냐라고 묻는다면 대답은 No. 샤롤라 또한 재미난 볼거리다. 보통의 예배당들은 곧은 직선이나 십자가 형태를 하고 있지만 이곳은 예루살렘의 성전을 모티브로 한 곳이라 조금 독특한 구조를 띄고 있다. 16면체인 방 안의 8각 예배당도, 정성을 다해 그려진 프레스코화도 포르투갈에서 흔치 않은 것들이다. 지붕과 기둥의 이음새 부분은 유연한 곡선으로 연결되어있어 특히 아름다웠다. 한껏 자라난 거대한 버섯을 아래에서 올려다 보는 것 같기도 했다.

△ 한쪽은 진짜였지만 한쪽은 그림이었다


개성 넘치는 공간들을 모두 꼼꼼히 둘러보느라 점심 식사가 늦어졌다. 마을로 들어서니 체스판을 꼭 닮은 광장이 나타난다. 광장에서 그리 멀지않은 곳에 자리를 잡았다. 노리고 찾은 것은 아니었는데 들어와서보니 중세시대의 식당을 표방하는 곳이다. 물론 그 시대엔 전기가 없었을테지. 덕분에 내부엔 전기 조명이 하나도 없고 온통 촛불 뿐이다. 어두컴컴한 실내에 식탁도 의자도 나무로 대강 뚝딱뚝딱 만들어낸 듯 투박하고 심지어 화장실 물 내리는 것도 도르래로 해야 하는, 조금은 희안한 식당이었다. 


그렇지만 가만히 앉아 촛불에 의지해 주변을 살펴보니 엉뚱한 듯 하면서도 은근히 재미있어 조금씩 이 집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종업원들의 옷차림도 그 시절 그 스타일! 중세시대 템플 기사단의 본부로 사용되었던 크리스투 수도원과도 곧잘 어울리는 장소였다. 음식 또한 멋 부리지 않은 정직한 맛에, ‘농부의 맥주’라고 이름 붙여 놓은 맥주는 직접 이 집에서 담그는 것이라고 설명해주니 어찌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을까.


덕분에 이 집에 대한 기억은 맛있으면서도 꽤나 재미있었던 기억으로 남았다. 당연히 식당에서는 음식이 맛있는게 제일로 중요하지만, 분위기도 절대 포기할 수는 없는 요소. 음식 맛이 비슷한 수준이라면 독특한 분위기의 식당이 조금 더 오래 기억에 남는 건 당연한 일이다. 

컵들은 소박한 듯 하면서도 하나같이 다들 귀엽다.

 


오늘의 숙박은 파티마에 잡아두었다. 이틀에 걸친 세 곳의 수도원 투어를 마치고 드디어 성지순례의 정수인 파티마로 간다. 



덧붙이는 말

1. “스페인 여행을 하면서 잠시 찍고 가는 곳” 정도로만 알려진 포르투갈에서 오래도록 머무르며 여행한 이야기를 전합니다.

2. 매거진 제목은 가토 다이조 著, <나는 내가 아픈 줄도 모르고>에서 인용하였습니다.

3. 이 이야기는 저의 개인 블로그에 있는 글들을 바탕으로 하기도 하고 안하기도 합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현지인의 favorite place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