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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사람

다이소의 동물 타이머와 포트넘 앤 메이슨의 모래시계

by 나예

주방에서 이것저것하다보면 종종 타이머가 필요하다. 휴대폰에 기본적으로 탑재되어있는 기능을 쓸 수도 있지만 휴대폰으로 레시피를 보고 있다거나 사진을 찍는다거나 하는 경우도 많아 별도의 타이머가 있는게 더 편하다. 타이머의 세계도 꽤나 버라이어티한데 간단히 버튼을 눌러 설정하는 디지털 형식도 있고 태엽을 감는 느낌을 자아내는 아날로그 형식의 타이머도 있다. 드르륵 드르륵하고 감기는 것은 내 취향이 아니라 나는 주로 디지털 형식, 다이소에서 2천원이면 살 수 있는 아주 기본적이고 단순한 모델(이것도 가격대가 올라가면 여러 기능이 추가되는 것 같은데 어차피 여러 기능이 있어도 나같은 사람은 쓰지도 못한다)을 쓴다. 10년 전에 다이소에서 구매한 분홍 돼지 모양의 타이머가 아직도 멀쩡하다. 얼마 전 아주 오랜만에 다이소에 가봤더니 당연하게도 그 모델은 없고 대신 다른 동물 모양으로 바뀌어있었다. 갈색 곰과 하얀 고양이가 있어 하나씩 데려왔다. 가격은 여전히 2천원이었다. 내가 나이를 열 살 더 먹고 물가가 천정부지로 오르는 동안에도 타이머의 가격은 그대로였다. 어찌된 일인지 타이머의 시간은 10년 째 멈춰있는 모양이다.



특별히 티 타이머의 경우에는 모래시계 형태인 것이 많다. 그럴싸한 물건을 갖고 싶어 오래도록 이리저리 뒤졌는데 전부 다 그게 그거인 것 같은데다가 해외 직구로만 살 수 있어서, 겨우 이깟걸 직구까지? 싶어 오래도록 미뤄뒀다. 대신 치과에서 “제발 3분 이상은 양치를 하지마세요. 이가 다 닳았잖아요”라며 쥐어준 노란 모래시계가 있어 한동안은 그걸 썼다. 하지만 차를 한 잔 마시려고할 때마다 화장실로 달려가 발을 적시며 세면대 위의 모래시계를 집어와야하는 내 꼴이 너무 우습고 무엇보다 이 물건이 플라스틱 특유의 저렴한 기운을 마구 뽐내고 있어 결국 포트넘 앤 메이슨의 티 타이머를 직구로 질렀다. 이렇게 탄소 발자국을 또 하나 늘렸다. 국내에서는 도저히 기미가 보이지 않아 어쩔 수 없었지만 양심에 찔리기는 한다.


모래시계 타입의 티 타이머는 대개 3개가 한 세트다. 2분, 3분, 5분짜리 모래시계가 함께 있어서 셋 중 어떤 시계를 볼지 내가 선택할 수 있다. 브랜드마다 시간의 조합은 다르기도 하고 색상의 조합도 다양하다. 포숑의 티 타이머는 핫핑크와 화이트, 블랙 요렇게 3개를 묶어놨고 내가 선택한 포트넘 앤 메이슨은 특유의 민트 컬러가 청량하다. 모래시계의 바디가 날씬한 것도 있고 트와이닝의 것처럼 뚱뚱한 것도 있다. 모래시계를 지탱하는 지지대 부분이 나무인 것도, 금속인 것도 있고 사이즈도 브랜드마다 조금씩 다르다. 이들의 공통점은 세 개의 모래시계를 묶어놨다는 것 외엔 별 것도 아닌데 브랜드 이름이 붙으며 가격대가 왕창 올라갔다는 점이다. 분명 바보같은 물건이다. 근데 이게 참 갖고 싶게 생겼다. 왠지 모를 영롱함이 있다.


바보같긴 해도 차를 우릴 때의 그 고요한 적막감을 삐비비빅! 하는 류의 요란한 기계음으로 깨고싶지 않다는 니즈에 모래시계만큼 잘 어울리는 물건이 없긴 하다. 특히 차는 뜨거운 물을 써야해 우리 집에서는 아이가 잘 때 몰래 먹는 대표적인 ‘몰먹’ 음료인데 삐비비빅!하다 만약 아이가 깨기라도 하면 단숨에 지옥문이 열릴 수도 있으니 더더욱 그렇다. 그렇지만 차가 우러나는 동안 자칫 재미있는 쇼츠라도 몇 개 발견하면 시간은 순식간에 흐르고 그 사이 차는 사약이 되어버릴 수도 있어 가끔은 적당한 데시벨로 알려주는 티 타이머가 있었으면 싶기도 하다. 모래시계는 계속 쳐다보고 있어야해 그것도 그 나름대로 속터질 때가 있다.


이미 사약이 된 차에는 우유를 부어 심폐 소생을 시도한다. 그걸로도 안되면 위스키를 탄다. 위스키라고 아무 위스키나 다 어울리는건 아니다. 내 입에는 버번이 맞아 나는 주로 버번을 탄다. 고급진 물건은 필요 없고 편의점에 파는 보통의 버번이면 충분하다. 이 날은 압끼빠산드의 바나나 블랙티에 메이커스 마커를 조금 넣어 마셨다. 달달한 바나나향과 또 다른 느낌의, 하지만 그에 결코 지지 않을 달달함을 풍기는 버번 위스키의 조합이 아주 기절각이다. 어쩌면 모래시계 같은 것은 처음부터 필요 없었을 수도 있다. 차가 사약이 되어도 그것도 그 나름대로 좋은 사람. 모래가 다 떨어지고 나서도 아주 한참 뒤에나 그걸 눈치채는 사람. 그러면서도 또 새로운 모래시계를 찾아 어슬렁대는 사람. 나는 그런 사람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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