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살림을 차리고 그간 내가 쭉 써온 칼은 도루코의 마이셰프였다. 특별한 칼은 아니고 그냥 평범한 보통 칼이다. 딱히 단점이랄 것도 없어서 오랜 세월 큰 불만 없이 잘 썼는데 칼날이 점점 무뎌져 종국에는 고기를 써는게 아니라 찢는 수준이 됐다. 과도가 상대적으로 더 상태가 나았기 때문에 이 때부터는 과도를 식칼처럼 썼다. 과도도 금방 망가졌다.
범지구적인 전염병이 일상을 휩쓸기 전까지는 다니던 교회에서 식사봉사를 했었다. 교회 별관 같은 곳에서 공짜 식사를 제공하면 이 한 끼가 필요한 사람들이 알음알음 찾아와서 조용히 먹고 갔다. 꽤 많은 양을 조리해야 했던지라 칼을 비롯한 조리 도구들이 금방 상했는데 정해진 예산 안에서 음식을 마련해야했기 때문에 이런 것들을 교체할 엄두는 내지 못했다. 그럴 돈이 있으면 고기를 좀 더 사자, 칼은 다음 달에 바꾸자 하며 모든 소비가 기약 없이 미뤄졌다.
이 날도 이제는 칼 진짜 바꿔야 돼요, 김치도 안썰리잖아요, 이러면 앞으로 저는 칼질 안할거에요 같은 말들이 오가던 중이었다. 그때 한 할아버지가 조용히 다가와 건넨 말은 다소 놀라운 것이었다.
“내가 칼을 좀 갈 줄 아는데..”
그리고는 숫돌 같은 것을 꺼내 교회 주방의 칼을 전부 슥슥 갈아놓고 사라졌다. 이 공짜 식당에도 단골 손님이 몇 있었는데 이 할아버지도 그 중 한 분이었다. 실로 귀신같은 솜씨였다. 하루는 내가 귀신의 바짓가랑이를 붙들었다.
“할아버지, 저 집에 있는 칼도 가져와도 돼요?”
“그래요. 그동안 내가 공짜로 밥 많이 먹었으니까”
그 때 내 도루코 두 자루는 다시 살아났다. 하지만 얼마 뒤 종교 단체의 집합을 비롯한 여러 활동들이 금지되면서 교회는 문을 닫았고 그 할아버지를 본 것도 그 때가 마지막이었다. 칼은 다시 무뎌지고 있다.
지금은 세라믹 칼을 주로 쓴다. 아기 이유식에는 다들 세라믹 칼을 쓴다고 해서 멋도 모르고 구입했다. 금속 칼은 재료를 손질하는 과정에서 산이나 알칼리에 반응하기 때문에 영양소가 파괴될 수 있고 음식에서 특유의 쇠맛이 날 수도 있어 이유식 용으로는 적합하지 않다는데 그게 어느 정도로 중요한 부분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이미 무뎌진 도루코로 야채나 고기를 깨알같이 잘게 다지기는 힘들고 금속 날에 녹이 스는 경우도 본지라 남들이 좋다는데는 이유가 있겠지 하고 또 덜컥 구입했다. 체스판을 닮은 체크 무늬가 인상적인 록나이프로 골랐다. 손잡이는 톡톡 튀는 네온 컬러로 했다.
세라믹 칼은 금속 칼과는 좀 다른 느낌으로 잘 든다. 금속 칼이 날카롭게 썰린다면 세라믹 칼은 좀 부드럽게 스르륵하고 썰리는 느낌이 있고 무른 식재료를 아주 정교하게 다룰 수도 있다. 두부로 굳이 피에타를 만들겠다는건 아니다. 여기서의 정교함이란 빵칼이 아님에도 빵이 뭉개지지 않고 스윽 잘리고 토마토가 샤샥 하고 썰린다는 느낌에 가깝다. 도마에 칼이 닿는 느낌은 뾰족 구두를 신고 종종 거릴 때의 또각또각하는 느낌과도 유사한데 칼 자체의 무게도 가벼워서 이래저래 장난감 칼로 소꿉놀이하는 기분도 든다. 한 마디로 절삭감이 너무너무 좋다. 자꾸만 뭔가 더 썰고 싶어진다. 그렇게 앉은 자리에서 양배추 한 통을 다 채 썰어버린 적도 있다.
나는 이 칼을 쓰다보면 자꾸 돌 생각이 난다. 아주 단순하게 생각해 세라믹은 도자기고 도자기는 흙으로 만들고 흙은 곧 돌이니까. 인류가 사용한 최초의 칼은 돌이었다. 구석기, 신석기 같은 개념을 끌어오겠다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돌로 나뭇잎을 짓이기고 열매를 빻아서 최초의 요리를 했던 경험, 그 요리를 나누며 누군가는 엄마가 되고 또 다른 누군가는 아기가 되었던 경험. 이 경험들은 모두 돌칼에 닿아있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어렸던 내가 쥐었던 최초의 칼 역시 돌칼이었고 내 자식이 쥘 최초의 칼 역시 그럴텐데 그 녀석이 입을 댈 최초의 요리 또한 돌칼로 만든 것이라는 점이 참 재미있다.
새삼스레 세라믹칼에 대해 이것저것 검색해봤다. 도자기 접시의 이가 빠지듯 칼날의 이가 빠지는 일이 흔해 조심스레 사용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많았다. ‘그간 아무 의식 없이 막 썼어도 우리집 록나이프는 멀쩡한데?’ 싶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꼼꼼히 살펴보니 역시 이가 한 곳 빠져 있다. 그것도 제법 크게! 이가 빠진 것도 모르고 그간 잘도 써왔네, 나도 참 어지간하다 싶다. 나는 절삭감을 논할 자격 따위는 애당초 없는 인간인지도 모른다.
무던한 듯 하면서도 은근히 예민한 사람이 있고 반대인 사람이 있다. 나는 후자에 가까운 편인데도 대개는 예민한 인간으로 평가받는다. 그 평가는 언제나 직관적으로 보여지는 나의 겉 모습에 기대는 것이다. 진짜 나는 무던과 예민 사이 그 어딘가에 애매하게 자리하고선 그 애매함을 마음 편히 활용한다. 어떤 날은 그런 내가 좋고 또 어떤 날은 그런 내가 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