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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구질구질하고... 포트메리온 블루 하비스트

by 나예

빈티지로만 구할 수 있는 그릇들이 종종 당근에 올라오기도 한다. 당근 어플을 열고 이런 것들을 구경하는 것도 나름의 재미다. 하지만 나는 당근에서 매일같이 눈팅은 해도 여기서 실제로 뭘 사거나 파는 일은 거의 하지 않는다. 초반에 몇 번 이상한 사람들을 만나 심하게 데였고, 중고거래라는 것이 단순히 이 물품이 중고여서 저렴한게 아니라 이런 사람들을 상대하고 비위를 맞추는 비용이 포함된거구나, 하는 것을 체감하게 된 후 여기는 감히 내가 버틸 수 있는 바닥이 아님을 알았다. 얼마 되지도 않는 금전적 이득을 위한다기보다는 너무나도 멀쩡한 그 물건 자체가 아까워서 당근을 통해 새로운 주인을 찾으려 시도한 경우가 많았는데 지금은 뭐가 됐든 전부 다 버린다. 지구에게 미안하긴 하지만 더 이상 인류애가 말살됐다가는 나도 내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르겠어서 어쩔 수가 없다. 인간은 구질구질하고 추잡하고 치졸하고 치사하고 나약하고 또 악하다. 간혹 점잖은 상대를 만나더라도, 일단 누군가와 연락하고 길든 짧든 이야기를 나누고 일정을 잡고 만나는 일련의 일들 자체가 생각 외로 시간과 체력과 에너지가 드는 일이기도 하다. 그 부분을 돈으로 채울 수 있다면, 차라리 돈으로 채우는게 낫다는 결론이 났다. 이건 내가 돈이 넘쳐나서가 아니라 시간과 체력과 에너지가 없어서 그렇다.


또한 물건의 상태를 제대로 캐치할 수 있는 날카로운 눈이 내게 없다는 것도 당근을 꺼리는 이유 중 하나다. 하자가 있는 물건을 두고 하자가 없다고 교묘하게 속이는 사람을 만났을 때, 그걸 내가 간파할 수 있을까? 솔직히 자신이 없다. 서로서로 좋은 마음으로 솔직하게 거래하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으니까. 내 돈과 시간과 에너지를 써서 구한 물건이 알고보니 하자품이라니! 생각만 해도 벌써 열이 끓어 오르는 것 같다. 그런 위험한 일은 되도록 피하고싶다.


하지만 그 와중에 도저히 놓칠 수 없는 물건을 만나기도 한다. 이 모든 수고로움을 감수하고 품을 들이더라도 놓치기 아쉬운 물건! 그렇게 포트메리온의 블루 하비스트를 만났다. 포트메리온은 보통 보타닉 가든으로 대표된다. 흰 바탕에 초록 풀잎 테두리가 쳐져있고 가운데는 꽃이 크게 들어가있다. 누구나 아 그거! 라고 할 바로 그 그릇이다. 신혼부부들이 혼수용 그릇으로 많이 선택하는 걸로 알고 있고 실제로 내 주위 친구들도 그렇게 했는데 내 취향은 아니라 우리 집에는 보타닉 가든이 단 한 점도 없다. 이 녀석이 내 취향이 아닌 이유는 일단 그릇 자체가 두툼해서다. 나는 애당초 두툼한 그릇을 선호하지 않는다. 그리고 내 눈에는 두툼하고 투박한 느낌의 그릇과 산뜻한 꽃무늬가 다소 미스매치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투박할거면 완전히 투박하고, 산뜻할거면 완전히 산뜻한 쪽이 좀 더 내 취향이다.


하지만 블루 하비스트는 느낌이 완전히 다르다. 일단 두툼하지 않다. 그리고 칼라풀한 꽃이 전하는 산뜻보다는 차분하고 세련된 쪽이다. 무엇보다 90년대 중반에 한시적으로 생산되다 바로 단종이 됐고, 국내에 소개된 적이 많지 않아 꽤 레어한 녀석이다. 이런 녀석이 당근에 떡하니 올라와있는 것이다! “30년 정도 된 물건인데, 보관만 했고 사용한 적이 없어서 매우 깨끗합니다”라는 문장 하나가 판매자가 올려둔 설명의 전부였다. 블루 하비스트인데 상태가 좋다고? 실사용을 안했다고? 저 말들이 진실인지 거짓인지도 모른 채 내가 구매하겠다고 다짜고짜 챗을 남겼다. 지금 생각해보면 분명 뭔가에 홀렸던 것 같다.


이 녀석을 데려오기 위해 무려 주말 아침에 차까지 끌고 망원동으로 나갔다. 알고보니 판매자도 응암동 본가에서 지하철을 타고 온다고 했다. 평일에는 일 때문에 망원동에 있는데 주말에는 안가거든요, 그래서 집에서 출발해요,라는 챗이 와있었다. 망원동의 한 빌라 앞에 차를 세우고 한참을 기다렸다. 물건은 먼지를 탔지만 설명처럼 상태는 정말 좋았다. 눈에 띄는 칩, 크랙, 빙열이 없고 변색이나 착색도 없었다. 무늬가 소실된 부분도 없는 것 같았다. 30여년의 세월을 겪으며 아주 약간 빛이 바랬지만 이 정도면 A급, 어쩌면 민트급일 물건이다. 거래는 바로 성사됐다. 만약 아직까지 내 눈에 안띈 하자가 있다면 앞으로도 영원히 눈에 띄지 않기를 바란다.


도자기 계에서 파란색은 이미 익숙하다. 특히 흰 바탕에 파란 무늬, 청화백자 스타일은 이 세계의 스테디셀러다. 아주 많은 브랜드의 아주 많은 라인 제품들이 제각각의 방식으로 청화백자를 닮았다. 이 계통의 물건들은 청명한 블루와 화이트 컬러가 대비되며 깔끔하고 고급스럽다. 덴마크 왕실 브랜드라는 로얄 코펜하겐도, 국민 커피잔으로 이미 소문난 쯔비벨무스터도, 일본 특유의 감성을 뽐내는 마메종의 블루로즈도 모두 청화백자 에디션이나 다름없다. 특히 나는 풍성한 블루 컬러가 주는 특유의 청량감을 몹시 즐기는 사람인지라 이런 류의 물건이 이미 집에 많다. 때문에 요즘은 일부러 파란 물건을 자제하고 있지만 그래도 상태좋은 블루 하비스트는 참을 수 없으니까 이 날도 주섬주섬 외투를 걸치고 운전대를 잡았던 것이다.


누군가는 분명 다 똑같잖아! 라고 할거다. 이해한다. 그 미묘한 차이를 캐치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하늘 아래 같은 블루란 건 없어!”라고 해봐야 공허한 외침이다. “컵이 왜 그렇게 많이 필요해?” 하는 질문도 마찬가지다. 어차피 합리적인 이유 같은 것은 없다. 온종일 죽도록 남의 비위를 맞추고 돈을 받는데, 컵 하나도 내 마음대로 못 사? 하는 그악스러운 대답만 내놓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대답을 할 때는 눈도 어느 정도 뒤집어줘야한다. 역시 인간은 구질구질하고 추잡하고 치졸하고 치사하고 나약하고 또 악한게 맞다.


부드러운 스폰지에 퐁퐁을 묻혀 묵은 먼지를 닦아 냈다. 새 것처럼 깨끗하다. 마른 수건으로 물기를 깔끔하게 닦아두고 빨간 딸기를 잔뜩 올린 타르트를 만들었다. 하비스트라는 명칭이 주는 풍성함에 걸맞게 딸기도 잔뜩! 산처럼 올렸다. 하양과 파랑, 그리고 빨강 이 셋의 조화 또한 아주 찰떡 같다. 만족스러운 주말 오후의 티타임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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