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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지런해져야할 이유, 티크 나무 도마

by 나예

어렸을 적 우리 집에는 하얀 플라스틱 도마가 있었다. 엄마는 혼자 집안 살림을 하며 애를 둘이나 키우느라 몹시 분주했다. 먹고 살기 바쁜 시절에 재료 별로 도마를 따로 쓰는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았다. 으레 상상할 수 있듯 이 도마는 김치 물이 들고 고기 물이 들고 야채 물이 들면서 모서리 부분을 제외하곤 하얀 부분이 남지 않게 되었다. 본래 하얀 색이었다는 것이 무색할 정도로 얼룩덜룩. 그 처참한 비주얼의 도마가 뇌리에 깊이 남아 내가 도마를 살 때는 절대 플라스틱 도마는, 그리고 하얀 도마는 사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지금 돌아보면 그 도마는 잦은 칼질에 닳고 닳아 울퉁불퉁하기까지 했었다. 아마 매일같이 도마를 조금씩 썰어 먹은 셈이었지 않을까 싶다. 그 시절에는 그런 것에 대한 자각도 없었다.


나이를 더 먹고 내 살림을 차리며 내가 선택한 것은 TPU 재질의 얇은 도마였다. 가볍고 얇아 종종 칼질을 하다 도마 자체가 밀리는 일이 있었지만 다행히 큰 사고로 이어지지는 않았기에 오래도록 잘썼는데 이제는 이 도마도 너무 오래되어 새로운 도마를 알아볼 타이밍이 되었다. 한번 알아보기 시작하자 세상에는 헤아릴 수조차 없이 많은 도마가 있다는게 눈에 보였다. 관심이 없어서 몰랐을 뿐, 세상에는 너무 많은 물건이 있고 도마 또한 그랬다. 그 중에서 칼자국이 잘 나지 않고 물이 잘 들지 않는, 오염에 강한 것 위주로 알아보니 세라믹, 스테인레스, 유리 도마로 범위가 줄었다. 하지만 이들은 칼이 미끄러지면서 다칠 가능성이 있고 무엇보다 도마 자체에 손상이 잘 안가는 대신 손목에 칼질의 충격이 고스란히 전달된다고 했다. 작용-반작용의 법칙, 기본적인 물리학 얘기였다. 한마디로 나는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도합 6년 동안 물리를 배우고도 이를 실생활과 연관 짓지 못한 것이다. 이 정도면 문제가 있다. 그게 교육과정의 문제인지 나라는 인간의 문제인지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부디 후자이길 바란다. 전자일 경우라면 문제가 더 커지니까. 그 와중에 스테인레스 도마는 칼질할 때 특유의 소름끼치는 소리가 있다고도 했다. 어차피 나는 세라믹 칼을 주로 쓰기 때문에 스테인레스, 유리 도마와는 애당초 궁합이 맞지 않기도 해 종국에는 나무 도마가 물망에 올랐다.


나무 도마가 집에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간 이것들을 실제 도마처럼 사용해본 적은 없었다. 대개는 플레이팅용, 혹은 쟁반 대용으로 썼다. 내가 갖고있는 것들은 전부 캄포 나무로 만들어진 것들이라 색상 자체가 아주 밝아 뭔가 물이 드는 순간 돌이킬 수 없을 것이 불보듯 뻔해 그나마도 바싹 마른 빵 같은 것만 올리며 나름 아껴 써왔다. 이렇듯 나에게 나무 도마란 일종의 신주단지같은 물건인데 정말로 도마처럼 막 쓸 수 있을까 의심스러웠다.


무엇보다 물이 닿으면 썩어버리는 재질의 도마라니! 과연 내가 이런 물건을 관리할 수 있을까? 구체적으로는 매번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서 말려주고 종종 일광 소독을 해주고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기름을 발라주라는데, 일단 우리 집은 주방은 그렇게 바람과 볕이 잘 드는 곳도 아니거니와 매일 같이 미세먼지와 황사로 창문을 열지 못하는 뿌연 날들이 일상인데 자연 바람으로 잘 말리고 햇빛으로 소독하는 일이 현실적으로 가능할까? 내 몸뚱이에 바디로션을 바르는 일조차 제 때 못해 매일 아침 버석거리는 몸뚱이를 다급하게 셔츠 속에 밀어넣는 나같은 인간이 한 달에 한 번 도마에 정성스레 기름칠을? 과연 가능한 일일까?


하지만 한번 더 생각해보면 그 옛날 대항해시대에 전세계 바다를 누비던 배들은 모두 나무였지 않은가. 심지어 배의 아랫부분은 정박지에서조차 항상 물 속에 풍덩 잠겨있었다. 나무가 정말로 그리 쉽게 썩고 훼손된다면 이런 기나긴 항해 자체가 불가능했지 않을까? 합리적인 의심을 품고 이리저리 찾아보니 나무도 나무 나름이라는 결론이 났고 이런 방면으로 아주 강한 나무가 티크라고 해 티크 나무로 만들어진 도마를 구했다. 실제로 잘 사용할 수 있을지 불확실하고 가격도 만만찮아 미니 사이즈로 골랐는데 막상 받고보니 우리 집 주방에는 되레 미니가 더 맞는 사이즈였다. 오래된 집이라 조리 공간 자체가 좁은 집이다. 도마 자체가 무겁기도 해 오히려 잘됐다. 색상도 어두워 집에 있던 캄포 도마보다 변색에 대한 부담도 덜하다. 은은한 광택을 뽐내며 중후한 멋을 품고 있는 부드러운 밤색 나무 도마. 순식간에 부엌이 작은 숲이 된 것만 같다. 자연의 재료로 만들어진 물건만이 품을 수 있는 일종의 힘 같은 것이 있기는 한 모양이다. 그 단단한 풍채만으로도 엄청난 존재감이 있다.


늘 쓰던 세라믹 칼을 꺼내 이런저런 야채를 썰어봤다. 특유의 다정하고 경쾌한 소리가 마음에 든다. 손목의 가벼운 움직임에서 비롯되는 통통하는 소리만으로도 일종의 힐링이 된다. 좀 더 시일이 흐르면 분명 지금보다야 해이해지겠지만 일단 요즘은 도마를 사용하고 그 즉시 닦아 식기 건조대 위에 걸쳐두고있다. 날씨와 대기 상태가 도와주는 날에는 창가에 세워두기도 한다. 바깥의 누군가가 우리집 주방 창문을 본다면 마치 나무 판자로 창문을 막아놓은 것처럼 보일 것도 같다.


기본적으로 나무로 만든 도마는 비싸고 티크 나무로 만든 물건은 더 비싸다. 플라스틱이나 TPU로 만든 도마와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하다. 누군가는 저렴한 도마를 쓰되 자주자주 바꾸는게 더 낫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뭔가를 잘 버리지 못하고 오래도록 끌어안고 사는 나같은 사람에게 이런 방식은 잘 맞지 않는다. 오래도록 쓸거라면 비싼 물건을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 값어치를 하려면 관리를 잘 한다는 전제가 붙어야겠고 그러려면 내가 좀 더 내 몸뚱이를 바지런히 놀려야겠지만. 부지런해져야할 이유가 이렇게 또 하나 늘었다.


한 달에 한 번 정도 도마용 오일을 발라 관리해주라고 했는데 매일같이 도마를 쓰지는 않는지라 여전히 새 것 같은 컨디션이다. 때문에 아직 오일을 바르지는 않고 있다. 반복된 칼질에 도마의 표면이 닳게되면 그때는 사각사각하며 사포질도 해줘야할 거다. 애정에서 기반한 꾸준한 관리를 받은 물건, 그때서야 아마 이 도마는 내 손길이 닿은 진짜 내 물건이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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