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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이 되어보는 일, 파이어킹 제디트 컵앤소서

by 나예

펜데믹으로 인해 막혔던 하늘길이 뚫리고 실로 오랜만에 암스테르담에 다시 닿았다. 출장이었다. 암스테르담 지점장님을 만나 식사를 하던 중, 요즘 k-pop과 k-drama로 인해 네덜란드 안에서도 한국에 대한 관심이 굉장히 커졌다며, 이전과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한국어를 배우는 사람도 늘었고 한국과 관련된 것들 대부분이 주목을 받고 있다며 특히 한국 차가 아주 인기라고 했다. 특정 차종의 경우엔 지금 계약해도 1년 반 이상을 기다려야하는 정도라고 하셨다. 한국 사람들은 유럽 차를 사려고 1년 반을 기다리는데 유럽 사람들은 반대로 한국 차를 사려고 1년 반을 기다린다고요? 유럽 차가 훨씬 좋지 않아요? 하는 내 물음에 의외의 답변이 돌아왔다.


"뭐를 좋아해본 적 없죠? 예를 들면 홍콩 영화가 좋아서 거기 나온 것들이 괜히 멋져보이고 따라해보고 싶고, 갖고 싶었다거나?


설마 그럴리 있겠는가! 생각해보니 나에게도 그런 물건이 있었다. 나는 홍콩 시네마 키즈의 막차를 가까스로 잡아 탄 세대다. 막차 뒤 꽁무니에 매달리다보니 홍콩 영화 중에서도 아주 유명한 것들 위주로 경험했고 그런 것들에 빠졌다. 이를테면 <화양연화> 같은 것 말이다. <화양연화>는 비교적 최근에도 리마스터링 버전으로 재개봉을 해 어린 친구들도 제법 알고 있을 영화다. 이 영화 속에서 장만옥은 수십벌에 달하는 치파오를 입었다고 해 화제가 되기도 했는데 그보다 더 내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장만옥과 양조위가 함께 커피를 마시고 스테이크를 먹을 때 등장한 영롱한 민트 빛의 커피 잔과 오발 형태의 디너 플레이트였다. 파이어 킹의 제디트다.


1960년대 초반을 배경으로 하는 이 영화는 거의 강박에 가까운 수준으로 현실을 고증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60년대는 실제로 파이어 킹의 전성기였다. 영화 속 둘은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는데 특히나 제디트는 호텔이나 고급 레스토랑에 납품되던 제품이라 다른 라인의 제품들보다 좀 더 두껍게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다고 하니 <화양연화>는 그릇 고증마저도 완벽한 영화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완벽 그 자체인 미쟝센과 둘 사이의 숨 막히는 감정선 따위가 아니라 파이어 킹의 제디트를 비롯, 장만옥의 남편이 출장을 갔다 사들고 온 일제 코끼리 밥솥이나 장만옥이 국수를 포장해올 때 사용한 파스텔 톤의 보온병 같은 것만 보였으니 나도 참 어지간하다. 이미 그 시절부터 그릇 덕후의 싹수가 보였던 거라고 밖엔 설명할 수 없다.


그렇지만 지금은 60년대도 아니고, 여긴 홍콩도 아니니까, 반투명한 민트 빛 커피 잔이 지금의 우리 집에 과연 어울릴까. 영화 속 그 장면, 그 무드에서 찰떡인 건 분명한데 말이다. 이게 또 달리 보면 예전에 학교 앞 분식집에서 떡볶이나 순대 따위를 담아주던 그 초록빛 멜라민 그릇스러워 보이는 느낌도 없잖아 있는 것도 같고. 때문에 한 번 실물을 볼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만 오래도록 갖고 있었다. 마음은 마음일 뿐 그간 실제로 볼 기회가 없었는데 우연찮게 들렀던 교외의 작은 카페에서 제디트의 실물을 손에 쥐어볼 수 있었다.

우연찮게 의상까지 맞춤되어벌임


소감은 역시 화면은, 사진은 실물을 담지 못한다는 것. 특히 밀크 글라스처럼 빛에 따라 비주얼이 완전히 달라지는 물건은 더더욱 그럴 수 밖에 없다는 것. 또한 앞서 ‘민트빛’이라 표현하긴 했지만 사실 그건 요즘식 표현이고 제디트에는 맞지도 않다. 이건 정말이지 옥색이 맞다. 반투명하게 빛이 투과되는 밀크 글라스의 특성상, 말 그대로 일종의 보석같아 보이기에 민트보다는 옥이나 비취에 비유하는 것이 역시 더 어울린다. 이 물건이 만들어지던 시절, 미국에선 오리엔탈 바람이 불어 동양적인 물건들이 인기가 많았기에 일부러 이런 색상을 써서 제작했다고 했다. 아, 이전에 언급했던 아코팔이 프랑스 물건인 것과 달리 파이어 킹은 미국 물건이다. 이름부터 파이어 킹.. 내열 강화 유리라는 사실을 너무나도 드러내어 밝히는, 몹시나도 미국스러운 작명이다.


파이어 킹, 특히 제디트의 경우는 찾는 사람이 많은 반면 시중에 풀려있는 수량은 많지 않아 커피잔과 소서 한 조 당 국내 기준으로 대략 7~8만원 정도는 줘야 구할 수 있고 그나마도 타이밍이 잘 맞아야 한다. 본래 그 시절 미국에선 식료품 가게(지금으로 치면 작은 마트 정도일까)에서 주로 판매했고 오트밀이나 밀가루를 사면 하나 끼워주고, 영화관이나 주유소에서 사은품으로 주기도 했었다니 지금의 몸 값을 보면 기함할 노릇이다. 이베이로 가면 상황이 약간 나아지기는 하는데 배대지를 거치는 등의 수고를 생각하면 이도 만만한 일은 아니다. 한 때는 레스토랑에 납품될 정도로 흔했던 제품이었는데 지금 다 어디로 갔을까? 그 많던 파이어 킹은 누가 다 깼을까? 깨지지 않고 아직 남아있는 녀석이 있다면 그것은 어서 우리 집으로 와야한다! 빈티지의 가격은 지금이 가장 저렴하니까!


나는 주로 아침에 비몽사몽한 상태로 빈 속에 들이 붓는 뜨뜻한 차나 커피를 즐기며 위 건강을 해치는 짓을 자주 하는 사람이지만 이 날은 영화 속 두 사람이 그랬던 것처럼 든든하게 식사를 마친 후 어둑어둑한 시각에 전기 포트에 물을 올렸다. 장만옥과 양조위는 각자의 배우자가 되어 마주 앉고, 그들이 했을 것 같은 일들을 어림짐작하여 흉내내어본다. 그들이 부러워서도 아니고 그들이 미워서도 아니고 그들을 이해해보려고 노력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삶이란 그저 그렇게 끝없이 다른 사람이 되어보는 일이니까. 나 역시도 제디트를 손에 쥐며 잠시나마 다른 사람이 되어본다.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내가 끝없이 그릇을 모으는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화양연화 속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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