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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무는 공평하게, 아라비아핀란드 똔뚜

by 나예

작년 겨울엔 상당수 카페들이 11월 중반 정도부터 크리스마스 크리를 설치했던 기억이다. 트리를 크리스마스보다 이전에 꺼내두는 것은 괜찮지만, 아니 크리스마스를 손꼽아 기다리게 한다는 점에서 도리어 더 좋기도 하지만 희안하게도 크리스마스가 지난 후에 트리가 남아있는 것은 왠지 꼴사납다. “한번 조립해서 설치한 트리는 3월까진 두는거에요” 라는 선언의 반은 우스갯소리, 반은 진심이겠지만 그건 일반적인 가정 집에서나 통할 얘기고 트렌디함을 추구하는 공간에는 절대 어울리지 않는다. 27일 쯤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 치워버려야 속이 시원하다.


그릇도 마찬가지다. 기본적으로 그릇에는 계절감이 없지만 크리스마스 관련 그릇들은 그렇지 않다. 두툼한 빨간 외투를 뒤집어 쓴 산타 클로스나 목도리를 칭칭 감은 눈사람이 또렷하게 새겨진 그릇들을 여름에 쓸 수는 없다. 보기만 해도 진땀 난다. 우리 집은 트렌디한 카페가 아니지만 나 역시도 크리스마스 무드를 듬뿍 품은 그릇들은 11월부터 크리스마스까지, 좀 더 양보해서 12월 31일까지만 쓴다. 새해에는 싹 치워버리고 또 다시 11월을 기다린다.


11월 정도부터를 크리스마스 시즌의 시작이라고 본다면 이 시즌에 유독 니즈가 폭발하는 빈티지가 있다. 그건 바로 아라비아 핀란드의 똔뚜 머그다. 북유럽에서 산타 클로스를 도와주는 요정을 뜻하는 똔뚜는 이미 산타 클로스의 인기를 넘어섰고, 이 똔뚜를 깜찍하게 그려넣은 아라비아 핀란드의 머그는 진짜진짜 구하기 어렵다. 요즘은 상품의 컨디션을 꼼꼼히 따지고 구매할 여력조차 되지 않아 눈에 보이면 무조건 사야하고, 잠시 망설이는 사이 누군가 낚아채가는 일도 부지기수다. 니즈는 많은데 시장에 풀린 물건의 수는 매년 줄어드니 문자 그대로 부르는게 값. 가격은 이미 천정부지로 뛰었다. 4~5년 전까진 10만원 대 중후반에 거래됐지만 지난 겨울엔 무려 4~50만원 대에 육박했다. 머그 하나가 4~50만원이라니! 금을 담아 먹어도 그 정도는 못되겠다 싶지만 별 대책은 없다. 눈물을 머금고 포기하거나, 눈물을 머금고 지르거나. 빈티지의 가격은 오늘이 가장 저렴하다는 말은 언제나 옳다. 다행히 나는 저 정도 가격이 되기 전, 똔뚜를 들였다. 그래도 두 개를 한 번에 들일 여력은 되지 않아 외롭게 덜렁 하나만 들여 그릇장 깊숙한 곳에 숨겨놓고 아무도 없을 때 몰래 꺼내 나 혼자 쓴다. 설거지도 벌벌 떨며 한다. 내 실수로 이걸 깨는 날이 온다면 아마 나는 내 스스로를 절대 용서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혼자만 몰래 쓰는 컵의 가치란 무엇인가. 나만 알고 싶고 나만 쓰고 싶어서 숨겨두기까지 했으면서 이 컵을 꺼내는 날은 정말이지 미친듯이 사진을 찍는다. 이 귀여움을 나만 알 순 없다는 마음으로 정신줄을 놓은 듯 촬영 버튼을 누른다. 자랑은 할 거지만 아무에게도 실물을 보여주진않을거야, 하는 심술맞은 마음인가. 알다가도 모르겠다.


몇 달 전에 과천의 국립 현대 미술관에서 ‘이건희 컬렉션’을 봤었다. 이 전시의 원제는 ‘모네와 피카소, 파리의 아름다운 순간들’이었는데 워낙 길다보니 많은 이들은 그저 ’이건희 서양화 전’으로 불렀다. 그러나 정작 이 전시에 서양화, 그러니까 그림은 몇 점 되지 않았다. 고갱, 르누아르, 피사로, 미로, 달리, 모네, 샤갈의 그림이 각각 1점씩 해서 총 7점 뿐이었고 심지어 피카소 것은 그림 대신 도자기만 있었다. 피카소는 기네스북에 오를 만큼 다작을 한 작가이며 그 장르 또한 매우 다양하다. 말년에는 도자기 작업을 아주 많이 했기 때문에 그간 국내에서 만날 수 있었던 피카소 전시에 도자기가 떼로 오는 일도 아주 흔했다. 다만 기존 전시에서 피카소의 도자기들을 봤을 때 나의 감상은 ‘잘 하지도 못하는걸 왜 이리 많이 했지?’에 그치고 말았다. ‘워낙 비싸서 그림을 못가져오니 미더덕 같이 생긴 허접한 도자기만 잔뜩 가져와 작품 수만 채운거겠지? 입장료 아깝다!’인 때도 꽤 많았다.


그런데 이번에 공개된 도자기를 보니 헐! 피카소 원래 이렇게 도자기 잘하는 사람이었어? 하는 일종의 패닉이 찾아왔다. 형태 자체부터 피카소가 잡은 것도 있고 형태는 근처 공방에서 주문해 만들어와 디테일만 꾸민 것도 있었는데 뭐가 됐든 그간의 전시에서 봤던 것들과 크라스가 다르다. 어쩌면 이런 것들, 돈이 될 것들, 은 이미 다 거래가 끝나 누군가의 집으로 가버렸고 그렇지 못한 것들만 미술관에 남아 전시를 통해 공개되었던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전시에 공개된 피카소의 도자기 90점은 하나같이 전부 다 예뻤다. 이 이야기를 남편에게 했더니 “찌그러진 멍게같은 도자기도 좋다고 줄을 서서 보러다니는 보통 사람들을 지켜보며 회장님은 비둘기 접시에 진미채를 담아먹었겠네. 어떤 기분이었을까?” 라고 해서 한번 더 아득해졌다.


내가 하나 뿐인 똔뚜를 몰래 꺼내 쓰고 금이야 옥이야 하며 조심스레 닦아 다시금 깊숙한 곳에 감춰두는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의 품 안에는 똔뚜가 10개씩, 20개씩 쌓여있을지도 모른다. 그 수많은 똔뚜 중 하나는 강아지 물그릇으로, 또 하나는 책상 위 연필 꽂이로 쓸지도 모를 일이다. 상태가 좋지도 않은 물건을 프리미엄에 프리미엄을 얹은 가격으로 덜덜 떨며 구입하는 사람들을 뒤로 한 채. 세상이란 그렇게나 불공평하다. 하지만 불공평의 정점에 올라있던 그 회장님조차도 갈 때는 모든 물건을 내려놓고 갔다. 세상이 불공평한 가운데, 허무는 공평하게 찾아온다. 나는 자꾸만 헤밍웨이의 단편 <깨끗하고 불빛 환한 곳>에서 중년 웨이터가 중얼거렸던 기도문이 떠올라서 울고 싶어졌다.


Nada에 계신 우리의 Nada님,
당신의 이름으로 Nada해지시고, 당신의 왕국이 Nada하소서.
하늘에서 Nada하셨던 것과 같이 땅에서도 Nada하소서.
우리에게 일용할 Nada를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Nada한 것을 Nada하게 한 것과 같이
우리의 Nada를 Nada하게 해주소서.
우리를 Nada에 들지 말게 하시고, 다만 Nada에서 구하소서…


*Nada : ‘허무’를 뜻하는 스페인어. <깨끗하고 불빛 환한 곳>에서 중년 웨이터는 성스러운 단어들을 모두 Nada로 대체한 이상한 기도문을 읖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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