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서린 맨스필드, <차 한 잔>
누군가는 '잘 읽기' 위해서는 논리적이고 실용적인 정보성 글, 다시 말해 비문학 위주의 독서를 해야하는 것 아니냐 물을 수도 있겠다. 사실 우리가 일상에서 만나는 글들은 신문 기사, 어떤 전자제품의 설명서, 공지글, 안내문, 계약서, 요리 레시피 등이니 전부 비문학이다. 생각해보면 문학을 읽는 일은 정보와 지식을 얻는데 별 도움이 되지않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잘 읽기 위해서는, 잘 못 읽는 사람일 수록 더더욱 문학 읽기부터 시작해야한다고 생각한다. 일단 문학은 스토리가 있어 재미있고 등장 인물들이 겪는 갖가지 사건들이 흥미롭기 때문이다. 읽기에 취미가 없는 이들이 스토리가 없는 글을 읽기는 생각처럼 쉽지 않다.
구슬이 서말이어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처럼, 책을 통해 습득한 것들은 무언가(그것이 내가 알고 있던 다른 지식이든 이전에 경험한 일이든)와 엮일 수 있을 때 진짜 내 것이 되는데 이런 능력은 꽤 많이 읽어본 사람만이 소유할 수 있다. 특히 정보성 비문학적인 글의 경우에는 글 안에서 캐낸 정보를 구조화하여 자신의 지식으로 통합시킬 수 있어야 하고 그 정보를 유용한 때 적절한 방식으로 꺼내놓을 수 있어야 하는데, 문해력이 부족한 경우라면 힘들게 읽었다 하더라도 이 모든 것들을 본인만의 방식으로 엮어내지 못해 그저 파편화된 상태로 남겨둘 가능성이 크다. 파편화된 지식은 그닥 와닿지 않고 와닿지 않으니 이런걸 알아봐야 뭐하나? 싶고 의미 없게 느껴진다. 무엇으로 시작하고 단련할까에 있어 그 순서를 말하는 것일 뿐, 물론 비문학을 포기하란 말은 아니다. 잘 읽지 못하는 사람의 경우는 일단 스토리가 짱짱한 문학으로 시작하는 것이 좋고, 오랜 시간 집중력을 유지하기 어려우니 문학 중에서도 짤막한 글을 고르는 것이 좀 더 좋겠다는 의견이다.
또한 문학은 논리적이고 실용적인 글과는 또 다른 방식으로 우리 뇌에 신선한 충격을 준다. 이는 '문학소녀스러운' 감수성만의 문제는 아니다. 우리는 문학을 통해 다양한 삶의 조각과 그보다 더 다양한 인간의 모습을 마주 하며 세상을 보는 시각을 넓힐 수 있다. 베트남의 국민 작가로 통하는 반레는 서로에게 다가가기 위해, 책을 들고 이야기를 많이 나누어야 한다고 말했다. 서로를 이해하고 양해를 구하고 도움을 주고받고 더 나아가 서로 사랑할 수 있게 하는데 책이 좋은 수단이 되어줄 수 있다고도 했다. 직접 가서 보고 듣고 경험하는 것보다 때로는 책이 더 넓고 깊은 경험과 사랑을 줄 수 있다. 책읽기의 장점을 이야기할 때 늘 꼽히는 것 중 하나가 바로 간접경험인데, 직접경험이 피상적인 것에 그치게 될 여지가 클 때는 책읽기가 더 나은 대안이 될 수도 있다. 그 책이 얇고 가벼운 짧은 이야기들의 모음집이라 할지라도 책은 우리의 상상 이상으로 힘이 아주 세다.
이야기 속의 등장 인물과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자신의 깊은 곳으로 들어가 내밀한 감정을 느끼다보면 다소 막연했던 나의 감정을 작가가 정제해놓은 문장으로 만날 수도 있다. 이런 일은 책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일단 그 누구도 일상 속에서, 내 의지와 관계 없이 굴러가는 인생에 대해 "나는 인간이란 커다란 여행가방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무언가로 채워지고 움직이기 시작하고 내동댕이쳐지고 덜컹거리며 보내지고 잃어버려졌다가 다시 찾아지고 갑자기 반쯤 비워지거나 아니면 더 꽉꽉 채워지다가 마침내 궁극의 기차에 홱 올려놓으면 덜그럭거리며 사라져버린다."라는 식으로 말하지는 않는다. 나는 이 표현을 보고 정말이지 무릎을 탁! 치고야 말았다. 당장 모든 것을 끝장내버리고싶을 만큼 괴로운 것은 아니지만 어딘가 모르게 "이건 아닌데.." 싶은 기분을 '여행가방'이라는 똑 떨어지는 비유에 담았다. 휘몰아치는 감정적인 쓰나미보다는 윤슬을 표현하는데 분명 더 어울리는 솜씨다.
위 표현은 캐서린 맨스필드의 한 단편에서 따온 것이다. 캐서린은 남녀간의 미묘한 관계와 그 사이를 가르는 감정을 아주 날카롭고 섬세하게 캐치하는 작가다. 이런 류의 이야기들은 자칫하면 통속적인 연애썰이 되기 쉬운데 캐서린은 특유의 재능으로 이 지점을 교묘하게 피해간다. 그 와중에 시시 때때로 나타났다 사라지며 하루에도 열 두 번씩 바뀌는 여러 감정들을 포착해서 있는 그대로 그려낸다. 별 것도 아니라면 아닐 수 있는, 아주 사소한 감정의 틈바구니에서 갈팡질팡하는 인물들은 안쓰럽기까지 하다.
꽃가게와 골동품 가게를 오가며 돈을 쓰는 것이 취미인 상류층 부르주아 여성 로즈메리는 비오는 저녁 귀갓길에 차 한 잔 마실 돈을 구걸하는 스미스를 만난다. 로즈메리는 스미스를 굳이굳이 자신의 집으로 데려와 차 한 잔은 물론이고 그 이상의 음식들까지 대접하며 선의를 베푼다. 하지만 로즈메리의 선의 속에는 마치 자신이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속 주인공이 된 것 같은 일종의 연예인병과 낯선 이에게 바라는 것 없이 선의를 베풀었다는 점을 친구들에게 자랑할 수 있겠지? 하는 얄팍한 허세도 함께 한다. 한편 로즈메리의 남편 필립은 너무 쉽게 낯선 여자를 집에 들인 로즈메리를 이해하지 못한다. 저 여자는 대체 누구냐고 묻는 필립에게 로즈메리는 차 한 잔 할 돈을 구걸하길래 길에서 데려왔다며 저녁 식사도 함께 할 생각이라고 답하고, 필립은 길에서 데려온 것 치고 저 여자는 너무 예쁜데? 라 답한다. 잠시 후 로즈메리는 필립에게 '스미스가 돌아가겠다고 고집을 부려 어쩔 수 없이 돌려보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의미심장한 얼굴로 필립에게 한 가지를 묻는다.
<차 한 잔> 속 로즈메리의 선의는 그닥 아름답지 않다. 얼핏 위선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남편의 말 한마디에 그 날의 연극이 쉽게 무너지는 것으로 보아 로즈메리의 한계는 필립 안에 있음 역시도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한 사람에게는 아주 간절한 무엇이 다른 사람에게는 친구들에게 자랑할 하나의 이야깃거리일 뿐인 것 또한 씁쓸한 포인트다. 그럼에도 어찌됐건 스미스에게는 로즈메리의 선의가 실질적인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스미스의 입장에서는 본인을 지나쳐버린 수많은 사람들보다는 로즈메리가 훨씬 더 나은 인간일 수 있다.
캐서린의 단편 대부분은 자기 소개나 배경 소개 없이 다짜고짜 시작된다. 스무고개를 하는데 우리는 질문을 할 수 없고 캐서린이 제시하는 단서들만 하나씩 받아가며 인물과 사건과 배경을 그려내야 한다. 마지막 단서를 받아들고 전체 그림이 완성되는 순간, 줄곧 생기발랄하고 예쁘장했던 이야기는 갑자기 예기치 못한 서늘한 그림으로 훅 바뀌는데 그 와중에 분위기는 모호하고 결말도 명확하지 않다. 딱히 기승전결을 따르는 것 같지도 않다. 때문에 이전에 소개했던 다른 작품들에 비해 분명 좀 더 난이도가 있다. 누군가는 '난해하다'라고 평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는 캐서린의 이야기들을 만나고 나서, 세심하게 미주알고주알 다 알려주는 이야기와는 또 다른 매력이 불친절한 이야기 안에 있음을 알게 됐다. 사람의 감정, 특히 남녀 사이의 '내 마음 나도 몰라' 하는 감정들은 명확하게 똑 떨어지는게 아니니 더더욱 그렇다. 앞서 문학의 재미는 대개는 스토리에 있다고 했지만 사실 그렇지 않은 작품도 세상에는 많이 있고 그런 작품들에는 또 그들만의 맛이 있다. 나는 단편 덕후로서 캐서린의 단편들은 지극히 단편다운 단편들이라고 말하고 싶다.
어디선가 그런 말을 보았다. 한국인들은 끝마무리가 깔끔한걸 좋아한다고. 그래서 영화든 드라마든 책이든 결론이 확실히 나줘야 하고 열린 결말 같은건 평가가 박하다고 말이다. 그런 시각에서 본다면 캐서린의 단편들은 찜찜하기 이를데 없다. 이렇게 끝? 뭐, 어쩌라고? 하는 느낌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우리의 삶은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에 사실은 결론이 없는게 더 현실적인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한다. 그 사실에 수긍할 것이냐, 아니면 이 불확실한 세상! 책에서만큼은 확실한 결말을 보고 싶어! 라고 할 것인지는 물론 개인의 자유지만 때로는 말해지지 않은 대사 속에 더 많은 진실이 담기기도 한다는 점은 기억해둬야 할 것이다. 캐서린의 또 다른 작품인 <가든 파티>의 마지막 장면에서 사춘기 소녀 로라는 빈민가의 상갓집에 다녀오는 길에 인생이란 어떤 것인지를 설명할 길이 없어서 "인생이란.. 인생이란.." 하고 말을 더듬을 뿐이다. 이에 오빠 로리는 "인생이란 원래 그런것 아니겠니?" 하며 로라의 심정을 알아준다.
이렇듯 문학은 다른 이의 정신 세계로 들어가 일상적이지 않은 일들을 마주하게 한다. 새로운 시각으로 세상을 보는 경험은 재미를 넘어 감동의 영역에 가 닿게 하기도 한다. 이 정도 되면 읽기의 매력에 이미 깊이 빠진 셈으로, 읽지 말라고 뜯어말려도 몰래 숨어서라도 읽게 된다. 몰래 숨어서 읽을 지경이 되었다면 문해력을 걱정해야하는 단계는 일단은 지났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