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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예 Feb 10. 2017

벼룩시장이 전해주는 이야기들

나는 내가 아픈 줄도 모르고 #28

며칠 전에 정겨운 매력을 물씬 풍기는 알파마의 골목들을 둘러보긴 했지만 알파마에 그런 '골목'들만 있는건 당연히 아니다. ‘유적’이라고 부를 만한 것들(이를테면 성당이라거나)도 많이 남아있어 오늘은 굵직한 포인트 위주로 알파마를 다시 걷기로 했다. 이전에 알파마의 골목을 헤집고 다닌 이야기는 이쪽이다.


두 번째 알파마에서 가장 먼저 찾은 곳은 상 비센테 지포라 수도원이었다. 수도원은 여러 주제의 아줄레주로 장식이 되어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라퐁텐의 우화를 소재로 삼은 부분이었다. 라퐁텐의 우화 중 무려 38가지가 아줄레주로 표현되어있는데 이 부분만 따로 떼어내어 관람하기 편하도록 잘 정리해두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아는 이야기가 많이 없어 아리송했는데 나중에 찾아보니 내가 알고 있던 것은 대부분이 이솝 우화로, 라퐁텐의 우화와는 다른 것들이었다. 내가 알고 있던 “여우와 황새” 이야기는 여우는 납작한 그릇에 음식을 대접해 황새를 굶게 만들고, 황새는 호리병에 음식을 대접해 여우를 굶게 만들었다는 이야기이지만 이곳에서 만난 “늑대(여우가 아니긴 하다)와 황새” 이야기는 황새가 늑대 목에 걸린 가시를 빼내어주고는 보상을 요구하자 ‘내 입 속에서 무사히 머리를 꺼낸 것을 보상으로 알라’며 늑대가 으름장을 놓는, 다소 기가 막힌 이야기였다. 

이 수도원엔 브라간사 왕조의 석관들도 자리잡고 있다.


하지만 이 수도원은 브라간사 왕조의 석관이나 라퐁텐 우화를 엿볼 수 있는 아줄레주보다도 수도원 근처에서 열리는 리스본 최대의 벼룩시장, 일명 ‘도둑 시장(Feira da Ladra)’으로 더 유명하다. 수도원 코 앞에서 열리는 시장의 이름이 하필 '도둑' 시장이라니 좀 웃기는 얘기다.


도둑 시장은 13세기부터 몇몇 도둑들이 장물을 늘어놓고 팔면서 시작됐다(Ladra에는 벌레라는 의미도 있어 ‘골동품에서 나온 벌레’에서 파생된 이름이라는 이야기도 있다)고 하는데 지금은 그 규모도 엄청나게 커지고 재미난 볼거리도 많아 리스본에 온 여행자의 필수 방문 코스가 되었다고. 하지만 런던이나 파리의 잘 정돈된 벼룩시장에 비한다면 이쪽은 아수라장에 가까운 느낌이다.


 시장이라고 해서 제대로 된 가판대나 천막 같은게 있는 건 아니고 다들 대충 자리만 깔고 물건을 늘어놓았다. 정리정돈을 잘 해둔 사람도 있고 적당히 쌓아둔 사람도 있지만 어느 집이든 제각각 특색 있는 물건들로 가득하다. 포르투갈 특유의 분위기를 풍기는 화려한 타일과 찻잔, 앤틱한 소품들과 각종 액세서리, 책과 잡지, 옛 시절을 간직한 우표와 동전은 물론이고 군용물품까지. 게다가 ‘저런 걸 누가 사?’ 싶은 물건들도 누군가는 집어 들고 꼼꼼히 살피고 있으니 참으로 희안했다. 


내가 원하는 물건을 한눈에 찾기는 어려울 수 있지만, 그 과정 자체가 하나의 재미로 다가온다. 손님은 주인에게 이러저러한 물건 있냐며 말을 걸고, 주인 또한 잘 대꾸해준다. 그런 물건은 없고 대신 이런 게 있다든지, 지금은 없는데 다음번에 들고 나오겠다든지, 혹은 옆집으로 가보라든지 등의 대화가 계속된다.

시장 한켠에선 음악이 쏟아진다


전문 상인도 물론 있긴 하지만 물건들 대부분이 누군가의 집에서 나온 것들이라 남의 일상을 들여다보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도 무척 매력적이었다. ‘이 동네 사람들은 집에서 이런 접시를 사용하는군’, ‘카페에서 쓰던 커피잔이 잔뜩 있는걸 보니 근처 카페 하나가 문을 닫았나 보군’, ‘이 집의 애들은 어느덧 훌쩍 커버려서 더는 이런 장난감이 필요 없어졌나 보군’ 하는 식의 사연들을 눈치껏 알게 될 기회가 흔한 것은 아니니까.


이곳의 물건들은 정형화된 것이 아니기에 흥정은 기본이다. 하지만 여기서 이야기하는 ‘흥정’은 부르는 족족 물건 값이 깎인다거나, 처음에 부른 가격보다 싼 값에 구매하지 못하면 바가지를 쓴 호구가 된다는 그런 식의 흥정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두 개를 같이 내놓았지만 하나만 필요하니 하나만 사겠다든지, 전혀 관련 없는 물건이지만 함께 살 테니 가격을 조금 깎아달라든지 하는 식으로, 일종의 ‘협상’에 가깝다. 물론 포트루갈어로 협상을 할 수 있으면 훨씬 더 일이 쉬워진다.


물건 상태는 당장 쓰레기통에 들어가야 할 것 같은 상태인 것부터 포장도 뜯지 않은 새것까지 무척 다양해 용도에 따라 꼼꼼히 확인하고 구매하는 것이 좋은데 이 역시 흥정의 요소다. 물론 비슷한 품질의 물건일 경우, 마트나 백화점보다는 벼룩시장에서 구매하는 것이 훨씬 저렴하고, 잘하면 뭔가를 덤으로 더 얻을 수도 있다. 이날 우리도 작은 찻잔을 구매하기 위해 열심히 찾아다녔는데 커다란 찻주전자를 구매하면 찻잔은 그냥 주겠다는, 아주 적극적인 제안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 무거운 것을 내내 들고 다닐 자신이 없어 그만 두었다.)


마트가 물론 쉽고 좋지만 손때 묻은 물건에서만 찾아낼 수 있는 이야기까지 전해주지는 못한다. 누군가에겐 쓸모가 없어져 내다 팔기로 결심한 물건들 더미에서 나만의 보물을 찾아내는 보람 역시 그렇다. 그 맛에 많은 사람들이 없는 시간을 쪼개어가며 벼룩시장을 찾는게 아닐까 싶다.



덧붙이는 말

1. “스페인 여행을 하면서 잠시 찍고 가는 곳” 정도로만 알려진 포르투갈에서 오래도록 머무르며 여행한 이야기를 전합니다.

2. 매거진 제목은 가토 다이조 著, <나는 내가 아픈 줄도 모르고>에서 인용하였습니다.

3. 이 이야기는 저의 개인 블로그에 있는 글들을 바탕으로 하기도 하고 안하기도 합니다.

4. 도둑 시장에 대한 이야기는 지난 달 말, 슬로우뉴스에 기사로 발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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