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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예 Feb 17. 2017

여행의 향기, 그리고 중요한 것

나는 내가 아픈 줄도 모르고 #32

겨울 여행은 사진으로만 보면 마치 단벌 신사 같은 느낌이다. 외투를 여러벌 챙기기는 현실적으로 어려운데 사진엔 거의 외투만 찍히니까 외투 안에 뭘 입든 사진으로는 잘 남지 않는다. 하지만 사진으로 남고 안남고를 떠나서 이제 더 이상은 입었던 옷을 다시 돌려입을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양말도 속옷도 부족하다. 그러고 보니 어느새 손톱도 불편할 정도로 자라있었다. 그만큼 시간이 많이 지났다는 것이겠지. 낯선 곳에서의 시간들은 참으로 훌쩍, 빨리도 흐르는 것 같다. 그리하여 집이 아닌 낯선 곳에서 손톱을 깎고, 빨래방을 찾아 빨래를 돌리게 되었다.


동전 몇 개로 세탁과 건조가 되는 빨래방을 찾아 빨래를 넣어놓고는 모든 과정이 끝나길 기다리며 근처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별로 꾸민 것도 없는 작은 식당에 들어서니 포도주를 보관하는 오크통을 닮은 몸매의 할아버지들이 요리도 하고 서빙도 한다. 유쾌한 태도로 접시도 술잔도 쾅! 내려놓는다. 턱시도를 갖춰 입은 늘씬한 웨이터가 세련된 몸짓으로 가져다 주는 음식도 좋지만 여긴 이런 방식이 잘 어울린다. 음식들도 모두 푸짐한데다가 별 꾸밈없는 맛이어서 더 좋았다.


깔끔히 해결된 빨래를 찾아들고 숙소로 돌아와 생각해보니 한국으로 돌아갈 날이 그리 많이 남지 않았다. 마냥 신나고 들뜨는 마음으로 시작한 여행은 아니었지만 이제와 돌아보니 조금은 행복해진 것 같다. 행복해지려고 애써 노력하지는 않았는데 새로운 것들을 보고 듣고 맛보는 과정에서 나도 모르게 조금씩 행복해진 모양이다. 이번 여행이 가져다준 행복, 여행의 향기는 얼마나 지속될 수 있을까.

 

회사를 다닐 때, 여행은 한갓 신기루일 뿐이었다. 어제까지 낯선 이들로 가득했던 리스본에서 손톱을 깎고 빨래를 돌렸던 내가, 오늘은 사무실에 앉아 내가 아는 그 사람에게 예전과 똑같은 욕을 먹고 있는건 그 간극이 너무나 커서, ‘정말로 내가 리스본에 갔던 적이 있긴 했던가, 사실은 꿈을 꾼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업무에 복귀하고 반나절이면 내가 언제 행복했던 적이 있었나 싶게 다시 원 삶의 냄새에 찌들고 말았다. 하고 싶은 것도 없고 먹고 싶은 것도 없는, 궁금한 것도 하나 없는 그런 사람으로 되돌아가는데 하루도 걸리지 않다니. 난 적응을 무척 잘하는 사람이었던게 틀림없다.


그런 상황에서 여행의 향기를 오래 끌어안고 있는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건 내가 자리를 비운 동안, 내 일의 일부를 대신 처리해준 동료에 대한 매너이기도 했다. 좋았다고 솔직히 말하는 것보다는 형식적으로라도 나의 여행은 그저그랬으며, 그저그런 여행을 하겠답시고 며칠씩이나 자리를 비워서 미안하다는, 그런 시늉을 하는 편이 서로의 관계에 더 도움이 되었다.


물론 행동은 그렇게 하더라도 마음 속으론 여행의 향기를 꼭 붙들고 있는 일이 가능한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난 의지가 약한 사람이어서 그런지 아닌 척 행동하다 보면 정말로 아닌게 되어버리곤 했다. 결국 여행을 마치고 일상으로 돌아왔을 때 나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여행의 추억이 아니라 미안함과 멋쩍음, 그리고 회신해야 할 이메일들 뿐이었다.


그러니까 그 때는 그저 타지에 머무르는 그 며칠이 좋아서, 그 며칠을 위해 여행을 한 셈이다. 하지만 이번 여행은 조금 다르니까, 아마도 포르투갈이라는 나라에 대해서는 꽤나 오랫동안 향수 비스무리한 감정을 품고 살게 될 것 같은 기분이다.


밤은 깊어가고 갓 빨아온 옷들에선 여전히 비누 향기가 난다. 나를 죽도록 괴롭혔던 인간들의 얼굴을 떠올려보았지만 이제 그들의 얼굴에서 세밀한 부분은 잘 그려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없던 일이 될 수는 없겠지. 분명 조금은 나아졌건만 아직도 마음 한 켠은 구깃거린다. 그리고 아마도 그 구겨진 흔적은 영원히 남을 것이다. 하지만 문득,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따로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에는 당신들이 없다는 것, 그리고 지금 나는 분명 행복하다는 것. 



덧붙이는 말

1. “스페인 여행을 하면서 잠시 찍고 가는 곳” 정도로만 알려진 포르투갈에서 오래도록 머무르며 여행한 이야기를 전합니다.

2. 매거진 제목은 가토 다이조 著, <나는 내가 아픈 줄도 모르고>에서 인용하였습니다.

3. 이 이야기는 저의 개인 블로그에 있는 글들을 바탕으로 하기도 하고 안하기도 합니다.

4. 인간적으로 "상처받은 척 하지마. 너 독한 놈/년 인거 이미 알고 있어" 이런 말은 삼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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