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가 아픈 줄도 모르고 #39
이런 고백을 하면 나의 나이가 들통날 것 같아 두려운데, 난 어릴 때 우표와 크리스마스 씰을 열심히 모았었다. 그 시절의 나에게 우표 수집이란 그냥 보통의 취미가 아니었는데 그건 엄마도 아빠도, 할아버지도 우표를 모았었기 때문이다. 아주 오래된 그 우표책들을 그대로 물려받았기에 ‘우표는 모으는 것’이라는 생각이 당연했다. 우표책에 차곡차곡 모인 우표들은 그 때 그 시절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는데 더 이상 우표가 잘 쓰이지 않게 되며 우표를 구하기가 어렵게 되자 나의 취미도 어느덧 시들해져버렸다.
세월을 겪으며 취향이 바뀌기도 하고, 그럴 만한 여유가 없어지기도 하고, 세상이 변하기도 하기에 무언가를 꾸준히 모은다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이런 모든 장애물을 극복한 굴지의 수집가가 세운 미술관이 리스본에 하나 있다. 아르메니아 출신의 갑부 사업가인 굴벵키안이 세운 굴벵키안 미술관인데, 이 곳은 그가 평생에 걸쳐 모아온 것들을 전시해둔 곳이다.
그의 수집품들은 유럽 회화와 조각, 중세의 성서 필사본, 중국과 일본의 도자기와 공예품, 은식기, 페르시아 카펫 등 그 범위가 무척이나 방대하다. 이집트의 황금 마스크와 메소포타미아 시절의 조각, 어디선가 좋다고 감탄하며 뽑아왔을 굴뚝까지 있어 꼼꼼히 둘러보다보면 정말 한도 끝도 없다. 그 범위가 방대한 것도 대단하지만 물건들은 하나같이 다들 우아하고 예뻐서 ‘나 같아도 돈만 있으면 사 들이겠다’ 싶고 이것들을 사 모으면서 얼마나 행복했을지 그 기분도 알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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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벵키안은 포르투갈을 무척이나 사랑해 고국인 아르메니아가 아니라 아예 이쪽에 미술관을 짓고 그의 수집품들을 모두 남겼다. 미술관은 미술관 뿐 아니라 정원과 연못, 레스토랑과 카페, 야외무대, 도서관 등이 모두 갖춰져 있어 하나의 복합 단지 느낌이다. 구시가지에서 제법 떨어진 곳이지만 여기까지 온 것이 아깝지 않을 정도다. 갈 길 바쁜 관광객들보다는 가볍게 마실 나온 현지인들이 더 많아 무척이나 한가로운 분위기인 점도 좋았다. 물론 리스본에서 하루 이틀 머무르는 일정이라면 여기까지 둘러보기는 어렵겠지만, 좀 더 시간 여유가 있는 분에겐 꼭 추천하고 싶다.
굴벵키안 미술관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건 아름다운 보석을 활용해 만들어낸 장신구들이었다. 제각각 감탄을 자아낼 정도로 독특하고 섬세하게 꾸며져 있어 인간의 상상력과 그걸 실제로 구현해 내는 재주는 과연 어디까지인가 하며 또 한번 놀라고 말았다.
물건이 많다는건 단순히 돈이 많다는 것보다도 그 물건을 구입하기까지의 재미난 사연이 많다는 뜻이기도 하다. 아무리 갑부라해도 '뭐가 더 예쁜가' 하며 하나하나 고심해서 골랐을테고 가격이라는 것도 미리 정해져있는 것이 아니니 나름의 흥정이나 협상도 필요했을테고 우연한 계기로 얻게 된 물건도 있을테니 물건 자체가 하나의 이야기인 셈이다. 요즘은 미니멀 라이프가 대세지만, 이런 이야기들에 경이로움을 느끼는 나에겐 전적으로 맞지않는 듯 싶다. 세상에 이리도 예쁘고 재미난 물건이 많은데! 미니멀 라이프 같은 건 개나 주라지. 흥이다.
굴벵키안 미술관 관람은 '나는 이토록 커다란 공간을 가득 메울 만큼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가'에 대해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는데 아직 나의 공간은 많이 비어있구나 싶어 문득 허전함이 몰려왔다. 이럴 땐 역시 기름지고 푸짐한 음식이 필요하다. 이럴 땐 햄버거지. 햄버거를 먹자!
덧붙이는 말
1. “스페인 여행을 하면서 잠시 찍고 가는 곳” 정도로만 알려진 포르투갈에서 오래도록 머무르며 여행한 이야기를 전합니다.
2. 매거진 제목은 가토 다이조 著, <나는 내가 아픈 줄도 모르고>에서 인용하였습니다.
3. 이 이야기는 저의 개인 블로그에 있는 글들을 바탕으로 하기도 하고 안하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