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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이란 May 13. 2023

5/10  집은 나에게 무엇인가

필사적인 필사일기 - <친애하는 나의 집에게>

집은 우리에게 같은 장소가 아니었다. 누군가에게 집이 쉼터이기 위해 다른 누군가에게 집은 일터가 되었다. 보수도, 출퇴근도, 휴일도 없이 매일 똑같은 일을 반복하는 가사 노동의 현장. 엄마는 운전을 배우고 싶어 했고 같은 지역에 사는 친언니를 만나러 가고 싶어 했지만 할아버지 할머니는 웬만해선 며느리의 외출을 허락하지 않았다. '집처럼 편하다'는 관용구대로 일과가 끝난 뒤 돌아가는 휴식의 공간을 집이라 한다면 엄마에게 집은 집이 아니었다. 그러나 다른 가족에게 집이 집이기 위해 엄마는 집을 비워선 안 되었다.


어느 저녁, 나는 1층에서 엄마를 찾고 있었다. 주방, 거실, 할아버지 방, 삼촌 방, 화장실, 마당까지 차례로 둘러본 뒤 2층에 있는 부모님 방으로 올라갔다. 아직 하루가 끝나는 시간이 아니었기 때문에 엄마가 거기에 있는 것이 의아했다. 엄마가 '있어야 할 자리'에서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다고 느꼈다. 엄마는 불 꺼진 방에서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은 채 웅크려 앉아 있었다. "엄마, 뭐 해?" 전등을 켜자 엄마가 말했다. "불 꺼. 나가." 나는 방을 나온 뒤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겁이 났다. 엄마의 목소리가 차가워서가 아니었다. 말끝에 묻어나던 울음기 때문이었다.


다크 헤리티지 Dark Heritage, 또는 네거티브 헤리티지는 부정적 문화유산을 뜻한다. 한때는 사라져야 할 장소로 여겼지만 부정적 문화유산도 기억해야 할 과거로 재인식되면서 일제의 소유였던 관사나 적산가옥, 군부독재 시절 국가폭력의 현장이었거나 통치의 수단으로 악용되던 장소들은 일종의 관광지가 되었다.

(중략)

집에 관해 이야기하기 위해 북성로를, 집 안팎으로 다크헤리티지가 넘쳐흐르던 그 장소를 떠올려야 했다. 나는 일제 강점기의 집과 건물들이 늘어선 골목을 걸어, 쿠데타로 대통령이 된 졸업생의 초상이 걸려 있는 학교에 갔다. 애국가가 흘러나오면 국기에 대한 맹세를 했고 반공 노래를 부르면서 고무줄놀이를 했다. 그리고 날이 저물면 성이 다른 한 여성에게 무급의 노동이 집중되는 가부장제 만연한 집으로 돌아갔다. 그 모든 기억은 이제 하나의 질문이 된다.

집은 나에게 무엇인가?


<친애하는 나의 집에게> (하재영 저)




상추를 씻다 뭐가 묻어서 보니 달팽이다. "어머나 어쩌다 달팽이가 여기까지 왔어?" 연체동물 특유의 미끈거림이 싫어서 만지지 않고 일손을 멈췄다. 싱크대 배수구를 통해 자연스럽게 방생하려는 순간, 아이가 후다닥 달려오더니 까치발을 들고 싱크대로 얼굴을 들이민다. "달팽이라고? 어디? 어머나 귀여워." 아이의 사랑스러운 눈빛, 그리고 그걸 지켜보는 나는 불안한 눈빛을 숨기지 못하고 채소 더미를 황급히 치우지만 아이는 이미 마음을 정했다. "이리와. 나랑 가자." 옥신각신 하느라 펄럭거리던 상추는 아이 손으로 넘어갔고 마법 양탄자처럼 펄럭이던 쌈 채소 더미에서 꽤나 스릴을 느꼈을 달팽이를, 아이는 상추 가마를 태워 투명 용기로 모셨다.


아이는 책에서 보던 유명 인사를 만나 신이 났다. 나도 옆에 서서 물끄러미 작은 생명을 바라 보았다. 새끼 손가락 한 마디 크기 정도의 미물이다. 작은 몸통에 돌돌 말린 집을 가진 녀석은 도통 움직이지 않아 얼핏 보면 생명을 다한 것 같아 보였다. 그러나 인내심을 갖고 더 지켜보니 아주 미세하게 움직인다. 집채만한 몸으로 몸체만한 집을 짊어진 채.


"너, 집 있는 녀석이구나. 대단한 걸?" 논란의 여지 없는 주택 소유의 현장에서 부러운 나머지 나도 모르게 감탄을 날렸다. 나의 아버지는 20년 간 부었던 주택 청약에 당첨된 날, 세상을 얻은 듯 환호를 질렀고 나의 할머니는 자신의 남편이 세상을 떠나고 나서야 겨우 상속을 받아 자기 집이 생겼다. 드넓은 땅에서 호의호식 하는 문명의 시대지만 여전히 어떤 사람은 평생의 꿈이 자기 집을 갖는 것인데. 이 녀석은 죽는 날까지 자기 집을 갖고 살테니 자본주의 따위, 금리와 신용등급 따위는 모르겠고 그저 마이 웨이를 가면 그만일 거다. 자기 보다 열 배, 아니 스무 배는 큰 맛있는 풀 위에서 언제든 잠을 잘 수 있는 풍요로운 의식주 환경은 말할 것도 없고.


녀석의 집에 시선을 뺏겨 결국 아이의 자연 관찰 책까지 펼쳐 보기에 이르렀다. 귀엽게 웃는 달팽이 옆에 말 풍선이 말한다. "나의 집은 빙글빙글 소용 돌이 모양의 껍데기야. 부드러운 내 몸을 보호해 준 단다."

매번 느끼지만 아이가 보는 책은 구구절절 맞는 말만 한다.

집이 무엇이냐. 거친 세상에서 유일하게 나를 보호하는 곳. 내 몸 놔둘 그런 껍데기 하나는 있어야지, 그럼, 그래야지. 어디 사람만 그런 게 필요하겠어? 이토록 작은 녀석에게도, 여전히 세상은 거칠고 아프기에. 짐을 짊어진 모든 삶에게 집이 필요하구나. 자기 몫을 짊어진 녀석은 제 자리를 충분히 머무는 관조를 안다. 남 보다 천천히 살아갈 숙명을 지닌 녀석에게 집을 매번 찾아다니는 수고를 덜어 준 조물주의 마음을 헤아려본다. 씻어 놓은 상추를 몇 개 골라 녀석 옆에 놓았다. 촉촉한 물도 조금 채워 놔야 한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누구에게나 나의 집은 편안해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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