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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이란 May 20. 2023

5/8  애착은 지울 수 없는 소유다

필사적인 필사일기 - <사물의 중력>

어린 시절 내겐 장난감이 많지 않았다. 그 흔한 마론인형 하나 없었다. 읽을거리도 궁핍했다. 디즈니 동화 전집이 있는 친구 집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틀어박혀 있다가 친구 어머니에게 쫓겨나곤 했다. 별로 아쉽지는 않았다. 내가 사는 곳은 경상도 어촌이었고 당시는 1980년대 초였다. 초등학교, 중학교 내내 많은 친구들이 방과 후면 농사일을 돕거나 동생을 돌보거나 집안일을 했다. 교육열도 형편없이 낮았다. 학원도 과외도 없었다. 애들한테 장난감과 동화책을 사준다는 건 외지에서 수산공장에 파견 온 간부들, 공무원들이나 생각해봄직한 일이었다.

 (........)

그런 내게도 봉제인형이 하나 있었다. 곰이나 강아지가 뭐 그런 종류였을 것이다. 나는 그걸 물고 빨며 아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인형이 사라졌다. 대여섯 살 때였다. 아무리 찾아도 없었다. 곰곰 생각해본 결과, 동네 언니들과 바닷가에서 놀다가 잃어버린 것 같았다. 그날부터 나는 매일 바다에 나갔다. 지금은 해안도로를 만드는 바람에 완전히 사라져버렸지만 그 때만 해도 마을엔 폭이 10미터는 족히 넘는 모래밭이 있었다. 어린 내겐 광대한 사막 같은 곳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발끝을 내려다보며 몇날 며칠을 해메고 다녔다. 엄청난 상실감과 그리움, 후회, 막연한 기대를 품고서.

이제 나는 그 일을 마치 오래전 관람한 영화의 한 장면처럼 기억한다. 하늘과 바다와 모래밭의 경계가 흐릿할 정도로 회색 안개가 자욱한 날, 조그만 꼬마가 잃어버린 곰 인형을 찾아 혼자 울면서 해변을 쏘다니는 것이다. 그 꼬마의 시선이 아니라 꼬마를 바라보는 제3의 시선이 되어 사건 전체를 기억하는 셈이다. 그렇다. 이것은 가공된 기억이다.

정말 내가 잃어버린 걸까? 엄마가 내다 버리지 않았을까? 그건 곰이었나, 강아지였나? 당시 유행하던 양배추 인형 같은 거였나? 정말 내게 그 인형이 있긴 했을까? 혹시 너무 갖고 싶은 나머지 내가 꾸며낸 가공의 친구는 아니었을까? 이 기억은 언제부터 내 머릿 속에 자리 잡고 있었을까? 대여섯 살? 아니면 열 살 혹은 스무 살 때 초자아니 뭐니 하는 뇌 작용으로 생성된 가짜 기억은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그 일을 떠올릴 때마다 가슴 한 구석이 맴도는 이 그리움과 아쉬움은 뭐란 말인가? 그러니 나는 그저 믿을 수 밖에 없다. 내 생애 최초의 , 나만의 소유물이 그 인형이었고, 나는 그것을 잃어버렸노라고.


<사물의 중력> (이숙명 저) 중 "잃어버린 애착인형"





며칠 전부터 알람 소리 대신 얼굴로 쏟아지는 햇살이 간지러워 눈을 뜬다. 자연 친화적인 모닝콜 덕분에 비로소 계절의 변화를 실감한다. 진짜 봄이 왔구나. 나를 덮고 있는 이불이 좀 두껍다 싶어 철 지난 침구를 정리한다. 지난 달부터 차렵 이불을 꺼내 쓰고 있지만 눈 뜨면 베개 옆에 겨울 담요가 떡 하니 놓여있다. 잠자리 주인이 유일하게 겨울이길 허락한 그것은, 아이가 잘 때 마다 옆에 두고 자는 담요다. 아이를 낳고 산후 조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던 12월 어느 날 시어머니께서 보내주신 이 담요는, 분홍색의 복슬복슬한 천에 헬로 키티가 그려져 있었는데 크기도, 촉감도, 아기가 쓸 이불로 안성맞춤이었다.


아이는 유독 키티담요의 한 귀퉁이를 만지고 자길 좋아했다. 조용한 밤에, 눈을 감으면 모든 것이 사라질 것 같은 어둠 속에서 평화를 바라며 잠을 청하는 의식이었다. 어쩌다 그것이 없는 날엔, 아이는 눈이 감기지만 울음이 터지는, 졸음과 잠 사이 어딘가를 헤매기 일쑤였고, 그걸 보는 나도 답답한 밤을 보내며 '제발 잠만 자다오'라며 어린 영혼을 물리적으로 잠재울 궁리만 했다. 그리하여 단연코, 키티담요는, 갓난 아기 때부터 아이의 곁을 지킨 오랜 잠동무이자, 결코 거를 수 없는 밤잠 육아의 불침번을 매일 매일 기꺼이 서주는 나의 가장 친애하는 육아 동지였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감사의 표시는 이 담요를 깨끗하게 살살 다루는 일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 곁에서 밤을 책임지고 우리 집안의 평화를 지켜준 고마운 수호신을 깨끗하게 세탁하기란 쉽지 않았다. 아이의 허락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오늘 밤만 키티담요 없이 자는 거야. 알았지?" "알았어..."

아이는 세탁을 해야만 더 오래 쓸 수 있다는 말에 몇 년 전부터 몇 시간 동안의 이별을 허락했다. 건조기에서 갓 샤워와 드라이를 마친 뽀송뽀송한 담요를 꺼내오면 아이는 얼른 다가가 냉큼 펼쳐 놓는다. 그러곤 어디 흠집 난 곳은 없는지 꼼꼼히 살펴보더니 반가운 표정으로 킁킁 냄새를 맡으며 끌어안는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키티담요 냄새!" 아이가 저렇게 말할 때마다 세탁이 제대로 되고 있는 건지 걱정을 하지만 나도 덩달아 킁킁 냄새를 확인하고 다행히 아이가 말한 그 냄새는 후각의 작용이 아닌 심장의 변주임을 깨닫고, 담요에도, 세탁기에도, 아무 문제 없음에 안심한다.


세제가 아무리 화학 작용을 하고 세탁기가 아무리 통을 굴리고 돌려도 아이의 사랑은 변하지 않는다. 마치 수십년이 지나도 가장 좋아했던 장난감을 기억하는 나의 지나친 암기력처럼, 이따금 꿈 속에 들러 밤이 끝날 때까지 곁을 지켜주는 오랜 수호신의 여전한 의리처럼, 아이만 기억할 지워지지 않는 냄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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