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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이란 May 24. 2023

5/24 올여름의 할 일

필사적인 필사일기 - <여름의 할 일>

여름의 할 일 - 김경인


올여름은 내내 꿈꾸는 일

잎 넓은 나무엔 벗어놓은 허물들

매미 하나 매미 둘 매미 셋

남겨진 생각처럼 매달린

가볍고 투명하고 한껏 어두운 것

네가 다 빠져나간 다음에야 비로소 생겨나는 마음과 같은


올여름의 할 일은

모르는 사람의 그늘을 읽는 일

느린 속도로 열리는 울음 한 송이

둥글고 오목한 돌의 표정을 한 천사가

뒹굴다 발에 채고

이제 빛을 거두어

땅 아래로 하나둘 걸어 들어가니

그늘은 돌이 울기 좋은 곳

고통을 축복하기에 좋은 곳


올여름은 분노를 두꺼운 옷처럼 껴입을 것

한 용접공이 일생을 바친 세 개의 불꽃

하나는 지상의 어둠을 모아 가동되는 제철소

담금질한 강철을 탕탕 잇대 만든 길에,

다음은 무거운 장식풍의 모자를 쓴 낱말들

무너지려는 몸통을 꼿꼿이 세운 날카로운 온기의 뼈대에,

또 하나는 허공이라는 투명한 벽을 깨며

죽음을 향해 날아오르는 낡은 구두 한 켤레 속에,


그가 준 불꽃을 식은 돌의 심장에 옮겨 지피는

여름, 꿈이 없이는 한 발짝도 나갈 수 없는

그러니까 올여름은 꿈꾸기 퍽이나 좋은 계절


너무 일찍 날아간 새의

텅 빈 새장을 들여다보듯

우리는 여기에 남아

무릎에 묻은 피를 털며

안녕, 안녕,


은쟁반에 놓인 무심한 버터 한 조각처럼

삶이여, 너는 녹아 부드럽게 사라져라


넓은 이파리들이 환해진 잠귀를 도로 연다


올여름엔 다시 깨지 않으리  


<김경인 시집, 일부러 틀리게 진심으로, 문학동네, 2020>




베란다에서 나는 꾸륵꾸륵- 소리에 일찍 눈을 떴다. 나와 아이는 도대체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 살펴보니 실외기 뒤에 비둘기 한 마리가 있다. 마치 몸을 숨기려고 일부러 들어온 것 같은 녀석은 내가 문을 열고 다가오지 않았으면 하고 기도하는 것 같았다. 아이는 저 아이가 며칠 전부터 저곳에 있었다며, 비가 와서 쉬다 가려고 왔다가 저 공간에 갇힌 게 아닐까 걱정을 한다. 가만히 보니 녀석은 그 자리에서 가끔 날개를 퍼덕거릴 뿐 나가지 못해 그곳에 주저앉은 모습은 아니었다. 정말 쉴 곳이 필요했던 건 아닐까.


실외기, 비둘기, 눈에 보이는 단어들을 검색해 보니 '실외기 둥지'라는 연관검색어가 나온다. 아, 녀석이 지금 알을 품고 있구나. 그냥 날개 짓이 피곤해서 잠시 쉬어 가려고 고철 뒤에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던 게 아니구나. 베란다 문을 열었다 닫았다 하며 녀석에게 겁을 준 것 같아 머리를 긁적였다. 새끼가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 전문가의 손을 빌려 조치를 취하기로 하며, 혹시 성미 급한 이른 더위가 와도 에어컨을 켜는 일은 며칠 참기로 한다.


여름의 시작이, 누군가의 둥지를 지켜보는 아침이라서 다행이다. 고철 가득한 도시에 작은 그늘이 있어서 정말 다행이다.

어둡고 칙칙한 그늘이 아닌, 너무 뜨겁고 밝기만 한 해에게서 벗어나 잠시 쉬어 가는 그곳. 가장 불타오르는 절정의 계절을 살아가는 생명들이 땀을 뻘뻘 흘리며 집을 짓고 나무를 심고 새끼를 낳는 이유일 것이다. 더 나아가, 모르는 누군가가 잠시 쉬어 갈지도 몰라 활짝 열어 놓은 그늘이, 눈부신 세상이 버거워 찡그린 사람들도 하여금 인상 풀고 눈도 풀리고 마음도 풀어헤쳐 버리는 둥지가 되어줄지도. 봄에 심은 마음들이 여름에 시원한 그늘이 된다면 바랄 게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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