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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이란 Jul 09. 2023

지금 여기서 행복한, 자리 비움

필사적인 필사일기 - <모든 요일의 여행> 김민철 저

예전 책에

'여기서 행복할 것'이라는 말을 써두었더니 누군가 나에게 일러주었다.

'여기서 행복할 것'의 줄임말이

'여행'이라고.

나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요일의 여행> 김민철 저




다시 '휴식의 계절'이 오고 있다. 직장인의 봄은 계획대로 업무를 시작하는 시기라면 여름은 상반기 마감과 여름휴가가 기다리기에, 분주하면서도 밀도 있는 자리 비움의 시기이다. 학생들에게 방학이 그렇듯 직장인에게 휴가는 언제나 부족하고 고귀한 것이라, 효율적으로 휴가 일정을 배치하고, 휴가를 '잘' 보내는 것도 여름을 준비하는 어른들의 숙제다.


어쩌다 보니 작년 여름은 집에서 보냈다. 주변에서 뭐 했냐 묻길래 아무 데도 가지 않았다고 하니 휴가를 그렇게 보내면 어쩌냐는 반응이었다. 땡처리 좌석이라도 알아봤어야 했나. 휴가가 끝났다는 아쉬움도 컸지만 무의미하게 시간을 보냈다는 생각에 뒤늦게 후회가 밀려왔다. '왜 미리 여행 계획을 세우지 않았냐.' '숙박은 최소 6개월 전에는 알아봐야 하는데.' '인기 있는 핫플레이스는 방학에 가야 프로그램이 좋다.' 나보다 내 휴가에 더 진심인 사람들에게 일단 생각해 보겠다고 둘러댔지만 휴가를 다녀오는 일이 회사 업무 보다 더 어렵게 느껴져 올해 여름휴가가 벌써 걱정이 되었다.


한동안 여행을 열심히 다녔다. 산으로, 바다로, 더운 나라로, 덜 더운 나라로. 여행을 가려고 휴학을 하고 비행기 마일리지도 열심히 모았다. 천성이 계획쟁이라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여행 일과를 세우고 돌아다녔다. 그러나 이번에는 선뜻 내키지 않았다. 본격적으로 여행을 알아볼 엄두가 나지 않다는 말이 더 정확하겠다. 돌아다니는 대신 어딘가 앉을 생각뿐이라 일단 소파에 앉아 TV를 켜고 리모컨에 손이 닿는 데로 아무 번호나 눌렀다. 신기하게도 누르는 번호마다 여행 다니는 예능이거나 여행 상품을 소개하는 홈쇼핑 채널이다. 트루먼쇼처럼 나를 지켜보는 사람들이 짜 놓은 각본이 아닐까. 이럴 때는 여행을 가려는 폼이라도 내야 하나. 잠시 트루먼이 되어 보겠다며 화면 속 여행자들을 따라 그들의 여정을 지켜보았다. 모래가 다 비치는 해변에서 발을 담그고 싶어. 아메리카 대륙을 오픈카로 질주하고 싶어. 북쪽 겨울 왕국에서 순록 썰매도 타고 싶어. 나도 남편도 아이도 각자의 호기심을 불러내 옆에 앉혀 저마다의 방식으로 세계를 누비고 오니 벌써 창밖이 어둑어둑했다. 잠들기 전까지 각자 꿈꾸는 최고의 여행은 어떤 곳일지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그곳에 언제 갈지 기약은 하지 않았다. 그러기엔 밤이 깊었고 잠이 쏟아졌기에. 굿나잇을 하기 위해, 꿈을 꾸기 위해, 멀리 떠나는 건 다음에 하기로 하며 이번 휴가에는 가까운 시내를 같이 걷기로 했다. 괜찮은 여행이 되겠구나 하며.


동료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겠지만, 휴가를 잘 보내기 위한 여행은 여전히 내키지 않는다. 자리 비움을 잘 채우기 위한 여행은 아직 버겁다. 이번 휴가는 자리를 잘 비우는 시간이길 바라기에. 그리고 언젠가, 밤이 되도록 이야기하며 바랬던 여행을 위한 휴가를 낼 것이다. 그래서 이번 휴가는 바로 지금 여기서 행복할 것, 내가 딱 바라던 여행을 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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