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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이란 Jun 26. 2023

나의 비밀정원

 필사적인 필사일기 - <비밀정원> 오마이걸

내 안에 소중한 혼자만의 장소가 있어

아직은 별거 아닌 풍경이지만

조금만 기다리면 곧 만나게 될 걸

이 안에 멋지고 놀라운 걸 심어 뒀는데

아직은 아무것도 안 보이지만

조금만 기다리면 알게 될 거야

나의 비밀정원

아마 언젠가 말야

이 꿈들이 현실이 되면

함께 나눈 순간들을

이 가능성들을 꼭 다시 기억해줘


<비밀정원>, 노래- 오마이걸




처음 이 곡을 들었을 때, 나는 아이가 보는 만화의 주제곡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청량한 목소리와 전체적인 노래 분위기, 제목도 마침 비밀정원이라, 시크릿 쥬쥬, 숲의 요정 페어리루 등등 공주, 요정, 여신이 등장하는 만화에 딱이라고 생각한 거다. 실제로 만화 주제곡을 걸그룹이 부른 경우가 많기도 하니,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괜찮은 선곡을 했구나-하며.


그러다 다시 이 곡을 들은 건, 그러니까 야간 학위 과정을 듣느라 정신없이 지낼 때였다. 같이 수업을 듣는 동급생들과 공동 과제 활동 (대학에서는 이것을 팀플이라고 부르는 것 같다….)을 하러 타기업을 탐방하러 다니곤 했는데, 그날은 과제를 발표하는 날이어서 동급생 언니 (실제로는 5살 정도 많은 모 회사 상무님)의 차를 얻어 타고 부랴부랴 학교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시간이 빠듯한데 길은 막히고 퇴근 시간이라 딱히 돌아갈 다른 길도 없는 터, 나는 조수석에 앉아 언니의 차를 본격적으로 구경하려고 이리저리 열어 보고 눌러보고 있었다. 성격 좋은 언니는 하여간 어린애들은 심심하면 꼭 저래-하더니 음악을 들려준다며 재생버튼을 눌렀다. 회사에서 제공하는 값비싼 세단을 타고 다니는 언니가 틀어 주는 음악, 보나 마나 클래식이나 샹송이 나올 거라 기대하고 귀를 쫑긋 세웠는데,  상큼 발랄한 노래가 흘러나오는 것이다. 분명히 들어 본 노래여서, 아 이거! 하며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고 언니는 웃으며 흥얼흥얼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내가 걸그룹 노래를 따로 즐겨 듣는 건 아닌데, 그냥 이 노래가 너무 좋아서 매일 듣고 있어. 특히 가사가 너무 와닿아서."


언니는 창업 초기에 합류하여 수년간 회사를 키운 임원이었다. 마침 기업 공개를 앞두고 감당하기 어려운 많은 문제를 처리하느라 지쳐 있다가 우연히 이 노래를 들었는데, <이 안에 멋지고 놀라운 걸 심어 뒀다>는 말이 너무 좋아서, 자꾸 듣고 싶어서, 음악을 재생하고 또 듣기를 반복했다고. 아직 그 열매를 아는 사람들이 많지 않지만, 나만 아는 노력을 세상이 알게 되는 날까지 가슴에 품고 지켜 가야 하는데, 그냥 이 노래는 그 마음을 담은 것 같다고.


고상한 외모, 값비싼 세단을 타고 다니는 사업가가 힘들 때마다 듣는 노래가 이렇게 상큼하고 맑아도 되는 건가. 물론 그렇다고 성공한 사람들은 먼 나라의 귀족 음악을 들어야 한다는 공식이 있는 건 아니지만, 업계에서 나름 성공한 사람들이 가진 비장의 무기, 영혼의 수프는 뭔가 다를 거라 생각했는데 비루한 나의 취향과 별반 다를 게 없을 줄이야. 우리는 음악에 취해, 아무것도 아닌 씨앗을 나만 아는 곳에 심으며, 어떤 우울이 만든 깊은 동굴을 지나 조심스러운 소망이 만든 절박한 비밀 정원으로 가고 있었다.


너무 귀하게 얻은 씨앗을 심는 것은 기약 없는 지루한 기다림이다. 씨앗이 무엇을 피어 낼 지, 그날이 언제 올지, 세상이 꽁꽁 싸맨 비밀은 에누리도, 힌트도 없다. 그래서 때를 정하지 않은 일을 시작하기란 참 어렵고 씨앗은 뿌리를 내릴 기회도 얻지 못한 채 아무것도 내놓지 못한 돌멩이가 되고 만다.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고 쓰지 않았던 나의 돌멩이처럼.


요즘 리추얼을 하면서 기약 없는 일들을 위해 많은 시간을 쓰고 있다. 말라버린 돌멩이를 다시 땅에 심는 것처럼 아주 적은 가능성으로 시작한 일들이다. 분명 씨앗이었던 것들이니 뿌리를 내릴 기회를 한 번은 주고 싶어서 아무것도 안 보이지만 조금만 기다리며 물을 주고 바라보고 기다린다. 그리고 이 노래에서 가장 좋아하는 마지막 구절을 여기서 한 번 더 적어본다. 이 꿈들이 현실이 되면, 함께 나눈 순간들을, 이 가능성들을 꼭 다시 기억해 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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