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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이란 Jul 19. 2023

너무 졸린데 배고프면, 당연히!

필사적인 필사노트 - <다정소감> 김혼비

나에게 술이 삶을 장식해 주는 형용사라면 커피는 삶을 움직여주는 동사다.

<다정소감> 김혼비 저, [커피와 술, 코로나 시대의 운동]



어떤 밸런스 게임에서 <너무 졸린데 배가 고프면 자는 것과 먹는 것 중에 이것을 한다, 하나 둘 셋!>고 물었다. 나는 주저 없이 '먹는 것'을 선택했다. 조금 더 풀어서 설명하면, '먹고 놀기'를 좋아한다. 만약 내가 만화 속 캐릭터라면 아마 뽀로로와 포비(뽀로로의 친구로 북극곰이며 풍채가 좋고 뭐든 잘 먹음) 사이 어디쯤 일거라 믿는다. 마음먹은 일이 잘 되지 않을 때마다 진지하게 굴다 가도, 너무 심각해진다 싶으면 나는 친구들과 혹은 가족들과 모여 앉아, 일단 먹고 놀자-를 외치곤 했다.

거침없이 먹고 놀던 나는 인생 일대의 시기를 맞이했었다. 결혼하고 찾아온 아기천사! 세상에 이런 일이 나에게도! 임신의 기쁨도 잠시. 의사는 임신 중에 술과 커피를 마실 수 없다고. 당연히 알고 있는 사실인데 막상 안 되는 걸 사정없이 나열하는 의사가 원망스러웠다. 먹으면 안 되는 게 왜 그리 많은지!


생각해 보니 나는 맥주 없으면 안 되는데. 친구들은 너 진짜 큰일 났다고, 이 참에 알코올로 찌든 인생을 개조하는 거냐며, 맥주 냄새가 난다는 정체불명의 향수와 논알코올 맥주를 사다 주며 나를 농락하기 시작했다. 한 모금 마셔 보니, 어랏? 별로 먹고 싶지가 않네? 난 그냥 아기 낳고 진짜 맥주를 마실 테야, 가짜는 저리 가게나!- 당당하게 거절하며 생각보다 금주 라이프도 나쁘지 않다고 자신만만해하던 그때, 의외로 손이 덜덜 떨리는 금단 현상을 경험했는데 그것의 이유는 사실 맥주가 아닌 커피였다. 


꾸벅꾸벅 졸고 머리가 무겁고 커피 한잔만 마시면 될 것 같은데데데…. 불쌍한 얼굴로 배만 만지고 있는 꼴이 좀 안타까웠는지 내게 커피를 닮은 카페인 프리 음료를 다 쓸어 모아 사다 주었다. 그러나 착한 음료들은 수요 없는 공급이 되어 자리에 쌓여만 갔고, 커피를 마시는 이웃 동료들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곁으로 의자를 끌고 가 앉아 쉴 새 없이 킁킁 댔더니, 그들은 조심스럽게, 사실 나는 뽀로로도 포비도 아닌, 에티오피아의 사자였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그때 저지른 만행들은 돌고 돌아 업보가 되었는지, 얼마 전 입덧을 시작한 J대리가 시간마다 찾아와 커피 마시고 싶다고 의자를 끌고 와 옆에 앉는데, 나는 결코 굴하지 않고 오늘따라 커피가 너무너무 맛있다며 얄밉게 장난을 치는, 뽀로로와 포비 사이 어느 꾸러기가 되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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