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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이란 Aug 04. 2023

글쓰기라는 고통

필사적인 필사일기 - <엘레나 페란테 글쓰기의 고통과 즐거움>

사춘기 시절 시작된 글쓰기를 향한 열망 속에는 아마도 빨간색 세로줄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 선을 넘고자 하는 욕망과 넘으면 안 된다는 두려움이 동시에 존재했던 것 같습니다. 빨간색 경계선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 덕분에, 저는 지금도 깔끔한 글씨체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컴퓨터를 사용할 때도 문단이 끝날 때마다 양쪽 정렬 아이콘을 눌러 여백을 맞춥니다.

이 이야기를 확대하면, 제게 (글을 쓰면서 마주하는 수많은 어려움을 내포하는) 글쓰기는 여백을 침범하지 않고 칸에 맞추어 글씨를 썼다는 만족감과 끝내 경계선을 초월하지 못하고 그 안에 머무르고 말았다는 상실감과 허무함 모두를 의미합니다.


<엘레나 페란테 글쓰기의 고통과 즐거움> 엘레나 페란테 저, '고통과 펜' 중.




어제는 하루 반나절을 가득 채워 건강검진을 다녀오느라 사무실과 서재에 출석하지 못했다. 본래의 계획은 전혀 달랐다. 검진을 끝내고 예쁜 카페에 들러 오후 업무도 하고 글도 써야지. 그러나 공복 상태로 걷는 대낮의 거리는 뜨겁다 못해 펄펄 끓었고 '끼니'를 제외한 모든 바람은 증발했다. 게다가 이번 검진은 엄마와 함께 다녀온지라 엄마의 검진 후기를 듣는 것 또한 효도검진 코스 중 하나였다. 자연스럽게 카페 방문은 다음에 하기로 하고, 건강하게 살자는 주제로 밥을 마주하니 괜히 밥알 하나도 스무 번 씹어야 할 것 같은 느리고 착한 식사를 겨우 끝낼 수 있었고 겨우 시간을 맞춰 오후 업무를 시작할 수 있었다.


밤이 되어야 끝난 일과. 뭐라도 적어보는데 한 글자로 쉽게 옮기질 못하는 거다. 공복과 더위, 효도를 가장한 늘어짐과 바꾼 <오롯이 읽고 쓰는 시간>이 못내 아쉬워진다. 먹고 놀고 쉬는 것처럼 글쓰기도 거침없는 일이 될 순 없는 걸까.


엘레나 페란테가 말한 글쓰기에 대한 고백은 내가 찾던 그럴싸한 핑계와 엄살을 '감히 마땅한 고통'으로 승화시켜 주는 것 같다. 어떤 이야기라도 쓰고 있다는 처절한 만족감과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를 쓰는 거 맞아?-라는 뾰족한 물음에 쭈뼛거리는 허무함 사이에서 글쓰기는 찰나에 어느 한쪽으로 기울고 마는 아슬아슬한 평형 게임이었다. 완전히 기울어 무너지지 않으려는 고통의 시소 타기 속에서 나는 흔들릴 때마다 멀미를 느끼지만 차츰 익숙해지는 오묘한 스릴이, 어쩌면 이 밤에, 다시 새벽에 일어나 우두커니 앉아 생각에 잠기는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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