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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이란 Aug 10. 2023

글쓰기란, 술래 없는 숨바꼭질

필사적인 필사하기 - <열다섯 번의 낮> 신유진 지음

나는 결국 솔직하지 못할 것이다.

다만 어느 귀퉁이, 수려하지 않은 문장 하나에

투박하고 멋없는 진심 하나를 숨겨 놓을 테다.

술래 없는 숨바꼭질을 혼자 하면서 언제 들킬까 조마조마하며

아니, 들키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르며

행여나 누군가 진짜 나를 찾아 줄까

가만히 머리카락을 세울 것이다.


 <열다섯 번의 낮> 신유진 지음, 서문 중




1

글쓰기란 술래 없는 숨바꼭질이라고. 들키고 싶은 마음을 숨겨 놓는 것이 글쓰기이고 누군가 위해 술래가 되는 것 또한 이야기 꾼이 되는 길일지도. 


2

4박 5일간 시댁에 다녀왔다. 고귀한 여름휴가를 시댁에서 보내자고 한 건 나였다. 나를 기다려주는 시부모님을 위해 기꺼이 가야 한다고 자존감 높은 내가 나에게 <휴가 in 시댁>을 권했다. 서울에서 먼 길 온다고 음식도 미리 해 놓으시고 이불도 새로 바꿔 놓으셨다. 서울 뺀질이 며느리답게 나는 남도 음식을 아주 맛있게 먹었고 촉감 좋은 새 이불에 누워 파닥파닥 헤엄을 쳤다. 반나절을 그렇게 빈둥거리는 동안 뭐라도 할 일을 찾아야 할 것 같아 어머님 아버님 주변을 맴돌기 시작했다. 어머님은 커피와 다과를 차려 놓고 그간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셨다. 불과 어제 전화로 하셨던 이야기지만 나는 처음 듣는 것 같은 리액션을 하며 들었다. 어머님은 몇 년 전, 몇십 년 전에 있었던 이야기를 다시 꺼내곤 하셨다. 대부분 내가 이미 들었던 이야기였지만 속으로만 아, 그 얘기하시나 보다-하며 잠자코 모른 척했다. 가만히 듣다 보면 재미있는 것이, 같은 이야기지만 지난번에 말씀하실 때와 살짝 단어가 달라진다는 점이었다. 예를 들면 시골 할머니가 고집이 세서 본인이 직접 국을 끓인다는 내용은, 시골 할머니가 자식 눈치를 보느라 뭐 해달라는 말씀을 못하고 본인이 직접 국을 끓인다는 내용으로 바뀌었고, 혼자 방에서 자기 할 일만 하는 아버님이 무심하다는 내용은 묵묵히 혼자 취미를 즐기는 남편이라 다행이라는 내용으로 변해 있었다. 어머님은 계절마다 달라지는 반찬처럼 이야기를 식탁 가득 차려 놓았고 미묘한 문장의 맛을 감상하며 내가 할 일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투정 없이 이야기를 들으면 되는 것이었다. 


어쩌다 요즘 글을 쓰고 있다는 근황을 전하니 어머님이 깜짝 놀라며 축하한다고 또 맛있는 음식을 가득 내어 오셨다. 어떤 글을 쓰냐, 직장 다니느라 바쁠 텐데 언제 글 쓸 시간이 있었냐, 묻더니 하시는 말씀. 

"너는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사람이라 이야기도 잘 쓸 것 같아. 정말 대견하다." 


왜 글을 쓰냐는 질문에, 이야기를 더 잘 듣는 사람이 되고 싶어 쓴다고 대답해 버린 나는, 정작 4박 5일 내내 글을 거의 쓰지 못했다. 대신, 귀를 쫑긋 세운 채 눈을 맞추며 이야기 폭식을 하고 왔다. 나는 더 읽고 더 쓰는 사람이 되어야 했지만 휴가 내내 듣는 사람이고 말았다. 휴가를 다녀온 나는 부쩍 이야기가 부르고 속이 든든하다. 모든 이야기가 삶을 연결하고 있음을 알기에. 나는 나의 이야기와 당신의 이야기를 들을 용기를 낸다. 다시 숨바꼭질을 하러, 글을 쓰러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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