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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이란 Aug 23. 2023

언젠가는, 폴라로이드

필사적인 필사일기 - <우아한 언어>

작은 카메라는 거짓말을 하고 싶을 때, 정직할 수 있게끔 도와준다. 단렌즈로는 피사체와 나 사이의 거리를 좁힐 수 없다. 멀리서 일어나는 현상을 '줌' 할 수 없기에 그저 있는 대로 찍어야 한다. 자세히 찍고 싶으면 내 발로 가까이 걸어가야 하고, 그럴 용기가 없다면 거리를 둬야 한다. 곁으로 갈 수 있을 만큼 친근한 것은 가깝게 나오고, 멀리서 바라봐야 하는 낯선 것은 멀게 나온다. 내가 사진을 찍는 대상은 주로 좋아하는 주변 사람들이다. 그들과 있다가 기억하고 싶은 장면을 찍을 때도 손바닥만 한 카메라는 도움이 된다. 커다란 카메라를 꺼내 셔터를 누르는 순간, 우리의 시간은 카메라 크기만큼 망가질 거다.


내게 사진은 누군가를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일이기에 솔직한 모양으로 기록하고 싶다. 내 눈이 보았던 순간이 훗날에도 있는 그대로 남아 오늘을 이야기해 주길, 그런 생각을 하며 쪼끄만 카메라를 주머니에 넣어둔다. 


<우아한 언어> 박선아 저




이 글을 읽다 문득 떠올라 수납박스를 열었다. 개봉도 하지 않은 폴라로이드 카메라가 하나 있다. 선물로 받은 새것을 꺼내지 않고 애물단지처럼 두는 건, 내가 사진을 찍는 것도 찍히는 것도 즐기지 않기 때문이다. 그나마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는 건 삭제를 하거나 최소한의 편집이 가능하지만 폴라로이드는 편집 불가, 삭제 불가, 렌즈를 통해 그대로 뱉어 내기에, '못 찍어도 고'를 해야 한다. 개인적으로는 필터를 잔뜩 넣어 촘촘하게 화장한 사진을 좋아하지 않는다. 빛이 주는 색을 그대로 담으려는 노력이 더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피사체의 입장에서 빛을 제외한 어떤 자비도 허용하지 않은 정직한 즉석 촬영은 여전히 무섭다. 지나치게 솔직한 진실이 더 소름 끼치고, 너무 날 것의 존재는 비려서 거부감이 드는 것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놓치고 싶지 않은 아름다운 것들이 있다. 한강을 건너는 버스 안에서 행운처럼 노을을 만났다. 아름다운 세상에 살고 있다는 증거구나. 이 풍경을 간직하고 싶어 본능적으로 휴대폰을 꺼냈다. 아쉽게도 순간을 멋스럽게 담아내는 재주가 없어 사진 속 노을은 흐릿했고 차창에 반사된 다른 물건들, 사람들, 녹초가 된 내 얼굴까지 같이 찍히고 말았다. 행복한 순간을 사진에 담는 시도는 쉽지 않다. 사진을 '잘' 찍을 자신이 없는 데다, 사진에 나오는 내 모습을 보는 게 어색하고, 사진을 찍는 순간 과거가 되어 버리는 기분이 슬프다. 진실은 무섭고 행복은 아쉽고. 


빛에만 의지하며 세상의 진실들을 마주해야 할 날이 올 수도 있다. 그게 편안하고 아름답지 않을 수도 있다. 벌거벗은 내 마음을 껴안고 과거는 과거로 흘러 보내는 의연함이 필요할 수도 있다. 아니라고 거짓말을 하고 싶은 날,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꺼낼 것이다. 누군가를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일이기에 솔직한 모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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