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헤이란 Aug 25. 2023

뚜벅이에게 문명이란

필사적인 필사일기 - 김영하 작가 인터뷰

기득권이 편안하고 나머지 사람들이 불편을 감수하는 건 야만이고, 모두가 조금씩 불편한 게, 그게 바로 문명이라고 생각해요.


- 김영하 작가 <소설가의 여행법> 북토크 인터뷰 중 -




뚜벅이로 살며 나에게 지하철은 오래된 루틴의 집합체다. 7시 30분에 현관문을 열고 출발, 지하철 2-1칸에서 7시 45분 열차에 탑승, 노약자석 너머 칸과 칸 사이 가장 깊숙한 공간으로 비집고 들어가 눈을 감고 서있기. 12분 뒤 하차, 서른 걸음 정도 이동해 환승 노선의  2-2칸에 서서 열차를 기다리며 지브리 스튜디오 음악을 재생. 환승 열차를 타고 늘 서는 자리에 두 발을 어깨만큼 벌리고 서서 밀리의 서재를 기웃거리다 보면 내 앞에 앉아있던 승객이 생각보다 빨리 내리는 행운, 삼성역까지 앉아서 독서를 하는 행운을 따르기도.


10년 동안 아침을 이렇게 보냈기에 이 루틴은 마치 아는 문제를 단숨에 풀고 역시 나는 최고야-라고 말하는 뻔뻔한 변별력 제로의 챌린지였다. 지긋지긋한 지옥철, 하며 출근하기 너무 싫었다고 투덜대는 동료에게 '난 그래도 지하철'이라고 꿋꿋하게 구는 건, <맥모닝은 출근러에게 주어진 특식>이라던 선배의 말을 리트윗 하며 출근을 하나의 성과로 승화시켜야만 아침부터 배불리 간식을 먹을 자격이 있다고 믿어온 탓이다. 동료는 지하철은 좋은데 이기적인 사람들로 가득한 '지옥철'이 싫은 거라고 억울함을 토로했고 결국 맥모닝을 사다 주며 얼렁뚱땅 '그래도 지하철'로 논란을 잠재웠다.  


지하철 루틴을 완벽하게 달성하려면 몇 가지 변수를 고려해야 한다. 비가 많이 내리던 날, 우산을 들고 젖은 몸으로 탑승장을 가득 매운 승객들로 공기가 후끈 달아오르던 그날, 나는 예상한 시간과 열차 칸에 탑승하지 못해 출근이 늦어지는 게 답답한 상황이었다. 문제는 나만 아침에 바쁘고 지각이 신경 쓰이며 루틴에 예민한 게 아니라는 점이었다. 사람이 많고 열차도 일분 이분씩 지연되면서 승객들은 미묘하게 뒤틀린 표정으로 한숨을 쉬며 휴대폰에 고정한 채 조급함을 억지로 구겨 넣고 있었다. 기다리던 열차가 들어오지만 차창 너머로 보이는 가득한 인파에 아, 이번에는 타야 하는데, 하며 어떻게 비집고 들어갈지 머리를 굴리던 중, 아이를 태운 유아차 한 대가 내 옆에 서 있는 것이다. 출근시간에 유아차를 끌고 오다니. 내 몸뚱이를 열차에 집어넣는 방법과 저 유아차와 함께 타지 않는 방법을 동시에 생각하고 있는데 열차는 멈췄고 출입문이 열렸다. 내리는 사람 몇 명, 탑승하는 사람들에 비해 열차 안은 너무도 복잡해 보였다. 그런데 갑자기 한 남자가 내렸다. "아이랑 타세요. 저는 다음에 타겠습니다." 남자의 말 한마디에 사람들은 서로 몸을 구겨 넣으며 없던 공간을 만들어 내는 게 아닌가. 유아차를 끌고 온 여인은 정말 감사하다며 양해를 구하며 무사히 탑승했고 나는 결국 열차를 타지 못했다. 열차를 보내고 다음 열차를 기다리며 열차에서 내린 남자를 힐끗 쳐다보았다. 휴대폰으로 무언가 열심히 치며 연락을 보내는 듯한, 그러나 잘했다는 표정으로 편안하게 열차를 기다리는 듯한, 그 남자를 나는 계속 쳐다보았다.  


나는 그날 아침 루틴을 완전히 망쳤다. 열차를 놓쳤고 그 남자를 쳐다보며 얼빠진 사람처럼 서 있느라 지브리 스튜디오 음악은커녕 아무것도 들을 수도, 읽을 수도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 남자를 쳐다보느라 루틴을 망쳤다기보다는, 그 남자와 탑승객들의 행동을 다시 곱씹느라, 유아차를 끌고 온 여인을 등지고 서 있던 내 모습을 떠올라, 출근 시간을 지키지 못하고 아침에 할 일을 마치지 못한 나만의 원칙에 조금 흠이 생겼고 나라는 인간에 대한 신뢰는 완전히 무너졌다.


유아차를 보며 '쯧쯧'거렸던 나의 일그러짐은 아이를 키우는 사람으로서 부끄러운 행동이었고 분홍색 좌석을 가리키며 이보다 완벽한 교통시스템은 없다며 뚜벅이로 사는 건 멋진 일이야-라고 외쳤던 꾸덕한 낭만에 대한 모독이었다. 동료가 말한 '지옥철'은 어쩌면 내가 보여준 위선, 어떤 사람들의 이기적인 루틴을 지키기 위해 당연히 희생되고 있던 연약한 단면들일지도 모른다. 김영하 작가가 말한 모두가 조금씩 불편함을 감수하여 얻어낸 문명의 진보는 아마도 이런 게 아닐까. 예컨대 장마철에도 유아차를 끌고 출근할 수 있는 일상. 기꺼이 먼저 타세요-라고 말할 수 있는 배려. 출근러에게 주어지는 특별한 낭만은 맥도널드에 가지 않아도 출근길 곳곳에 숨어있다는 비밀.



(이미지 출처: pixabay)

매거진의 이전글 언젠가는, 폴라로이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