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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이란 Aug 29. 2023

그동안 정말 감사했습니다

필사적인 필사일기 - <오늘 밤은 굶고 자야지> 박상영 지음

"그동안 정말 감사했습니다."

사람들은 그간 나와 굉장한 친교를 유지했던 것처럼 자리에서 일어나 한 마디씩 덕담을 얹었고 심지어는 조금 전까지 나를 쥐 잡듯 잡던 김 반장조차도 어깨를 두드리며 앞으로의 삶을 응원한다고 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왔을 때는 11시가 조금 넘은 시간. 뙤약볕이 내 정수리를 비추고 있었고, 이건 정말이지 예상치 못했던 시간, 너무 한낮의 퇴사가 아닌가. 원래는 저녁쯤 퇴근해 근처의 회사를 다니는 친구들과 함께 술이나 한잔하고 들어가려 했는데, 갑자기 시간이 붕 뜨니 도대체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제야 태어나서 거의 처음으로 아무런 소속 없이, 오롯이 나 자신으로서 이 시간에 거리에 서 있다는 것을 절감했고, 그것은 무척 생경한 감각이었다.

언제나와 다름이 없는 평일 오후의 한낮인데 모든 게 달라져버린 듯한 느낌.

결국 내가 향한 곳은 다른 어느 곳도 아닌 집이었다. 가방이 무겁지도 않은데 이상하게 그렇게 됐다.

(…......)

나는 매일 싸우는 것처럼 살아온 것일지도 모른다.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세상과, 나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과, 사람들과, 어쩌면 그 무엇보다도 나 자신과 말이다.

<오늘 밤은 굶고 자야지> 박상영 지음, -너무 한낮의 퇴사- 중




휘둘리지 않기로 결심한 지 1년 만에 다시 야간 회의를 참석하고 주말에도 이메일을 쓰고 있다.

저녁이 있는 삶을 보장한다고 했던 회사는 정말 딱 저녁만 주었고, 덕분에 책을 읽거나 글을 쓰기는커녕, 밤에 꿈을 꾸는 것도 녹록지 않았다.

그렇다 보니 하루에도 몇 번씩 <새 메일> 버튼을 누르고 제목에 "그동안 정말 감사했습니다"를 쓰며, 저녁이 있는 최후의 날을 상상한다. 이대로 쭉 써서 그대로 전송하고 내일 사무실 동료들에게 인사를 한 후 노트북을 반납하면 미련 없이 끝낼 수 있을 것 같지만, 그 와중에 진짜로 실수로 <보내기>를 누를까 봐 침을 꼴깍 삼키는 건, 한밤의 회의만 겨우 고민하며 한낮의 퇴사는 미처 준비하지 못했기 때문이라서.

난 그저 나에게, 농담이니 긴장 풀라고, 조용히 메일 창을 닫으며 씁쓸히 웃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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