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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이란 Aug 18. 2023

재미없는 연극을 소망하다

필사적인 필사일기 - <그렇게 우리의 이름이 되는 것이라고> 신유진

인생이란 형편없는 시나리오 작가가 쓴 개연성 없는 극이 분명하다. 기껏 동네를 오간 것이 전부인 사람에게 그토록 극적인 죽음까지 마련할 필요는 뭐가 있었을까. 운명과 저주와 복수, 목숨을 건 사랑 따위와는 아무 상관없는, 매일 같이 그저 찐빵을 네 개씩 사다 나른 삶이었는데.


절뚝거리는 역할을 충실히 해내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심심한 연극의 무능한 연기자로 살아가겠노라 다짐했다. 목에 힘주지 않고 앞줄에만 겨우 들릴 정도로 소곤소곤 대사를 하고, 소란스럽지 않게 웃고 조금 울며, 부담스러운 모노드라마도 시끄럽고 거창한 연극도 아닌 두세 사람이 나와 적당히 서로에게 기대어 이끌어 나가는 극의 연기자가 될 것이라고.


그저 다리를 저는 아버지와 네발로 기어야 하는 할머니는 처연하지 않은 착한 조연으로,

큰 소리로 전할 필요 없는 마음을 안은 나와 세계가 아무도 알아보는 이 없는 주연으로,

그렇게 오래 연극을 하고 싶다고.

아버지 보다 느리게 걸으며,

아무리 달리 생각해도 처연하기만 한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 재미없는 연극을 소망했다.


<그렇게 우리의 이름이 되는 것이라고> 신유진 지음, '끝난 연극에 대하여'



이 책이 담은 다섯 가지 소설 중 두 번째 이야기는 나와 '세계'의 사랑에 관해 말하고 있다. 글 속 '나'와 '세계'의 대화는 마치 예전 어떤 기억의 장면으로 가는 VR을 쓴 것처럼 낯설지 않았다. 대학가 골목에 둘이 우두커니 앉아 잔뜩 술에 취한 채, 사는 건 왜 이럴까-, 혹시 나 너 사랑하니-하며, 암전의 골목을 서로 부축하며 걷는 젊은 연인을 지켜보니, 나 또한 길에 흩뿌려진 삶의 단어들을 줍던 시절이 떠오르며 잠시 나도 골목에 놓인 빈 의자에 앉아 소주를 주문했다. (VR 세상에선 소주를 마셔도 쉽게 취하지 않으리라 기대하며!)


한때 즐겨 보던 드라마를 다시 보듯 흐뭇하게 바라보던 나는 가난한 사랑 노래를 따라 부르듯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관조적으로 앉아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들어온 장면은 다름 아닌 '나'의 집이었다. 장애가 있어 곧게 서서 걷기 어려운 아버지와 네 발로 기어 다니는 할머니가 있는 곳. 가로등이 깜박거릴 때마다 세상이 가려주는 은밀한 표정은 연인들의 포옹도, 술을 빌어 건네는 고백도 아닌, 차갑게 식어 버린 찐빵처럼 사라지는 역할들이었다.


미처 다 비우지 못한 소주잔 옆에 만원 한 장 놔두고 책을 잠시 덮었다. 현실로 돌아왔지만 자꾸만 입 안에 맴도는 씁쓸함에 좀처럼 취기가 가시질 않는다. 청춘이라는 역할이 그저 버겁고 대사가 입에 붙지 않아 멋대로 굴던 나의 거짓 연기를 기억하기 때문일까. 아무도 알아보는 이 없는 무대를 떠나지 않고 재미없는 연극을 계속하는 절름발이 조연들이 떠올랐기 때문일까. 재미없는, 오랜 연극을 하고 싶다는 문장에서 나는 숙취가 느껴져 견딜 수 없으면서도 소주잔을 두고 온 곳을 다시 가겠다고 다짐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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