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순위를 변경하다

완벽주의 워킹맘의 취향 사수 에세이

by 헤이란
사랑은 마지막 남아 있는 모험이다.
- 꾸뻬 씨의 사랑 여행 중에서 -



꾸뻬 씨의 사랑 여행의 작가 프랑수아 를로르는

사랑을 함으로써 삶은 불행에 빠지고 그 불행은 권태로부터 우리를 지켜준다고 했다.

내가 소중히 여기는 존재가 있다면 그것은 기쁨이면서 동시에 불행이 될 수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많이 가지고 이루길 바라면서도 그것이 주는 압박, 책임감이 어떨지 막연하게 상상을 해본 적이 있다.


운이 좋았던 덕분인지 나는

거의 대부분 내가 한 만큼 반드시 결과가 나왔다.

얻은 만큼 지켜가는 것은 또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노력으로 이룬 결과는 결코 함부로 잃어버릴 것이 아니니까.

그래서 나의 삶이 소중한 것으로 하나씩 더 채워질 때 분명 더 감당할 무언가가 있을 것이고, 그게 당연하다고 받아들였다. 직업을 얻고, 가족을 얻고, 그리고 엄마가 된 후 나는 더 억세지고 강해지려 애썼다.




그러나 매는 모르고 맞든 알고 맞든 무지 아프다.




일요일 저녁, 아기가 갑자기 설사를 한다.

체온을 재보니 열이 난다. 집에 있는 해열제를 먹이고 안아보지만 보채는 강도가 심상치 않다. 결국 응급실로 데려갔고 아기는 장염으로 입원을 한다.





연차 휴가로 아기 곁을 지킨 건 이틀. 이번 주에 마쳐야 할 업무를 위임할 수 없어 결국 남편과 교대를 하고 출근했다. 사무실에서도 아기 상태가 걱정이 되어 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르겠다. 나와서 밥을 먹고 있는 내 모습이 부끄럽고 짜증 났다.

난 도대체 뭐 하는 엄마인 거지.



퇴근하면 곧바로 입원실로 달려가 아기를 안았다. 아기는 대견하게도 잘 회복 중이었다. 아기가 별 탈 없이 회복 중이라니, 세상 모든 것이 나를 도와주는 기분이었다. 내 노트북에 쌓인 할 일들만 빼고.



가 아파도 일은 끝내야 했다.

입원실에서 노트북을 켜고 새벽까지 일하고 업무를 끝냈다. 나는 기한 내에 일을 마쳤고

프로젝트는 늘 그렇듯 무사히 진행되어 갔다.



수고했다, 잘했다.

회사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잠을 청하는 아가에게 말했다.

엄마 일 잘했다고 칭찬받았는데 왜 이렇게 속상할까.

온전히 마음껏 너를 돌보지 못한 엄마라서 미안해.

아기는 막 신나는 꿈을 꾸기 시작한 듯하다.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괜찮아요 나는 잘 자라고 있어요.






사랑이란 다른 사람이 원하는 걸 내가 원하는 것보다 우선순위에 놓는 것.
- 영화 '겨울왕국' 중 올라프가 안나에게 하는 말 -



가장 소중한 것을 순위로 매겨보라고 하면

1순위는 잠시 빈칸으로 비워둔다.

그리고 잠시 생각에 잠긴다.

신이 나에게 모든 것을 빼앗고 단 한 가지만 지킬 수 있다면 난 무엇을 선택할까.



아이를 떠올리니 가슴이 먹먹해서 숨을 쉴 수가 없다.

나처럼 무뚝뚝한 사람도 신의 장난 앞에서는 간절한 엄마가 되는 걸 보면,

모성은 어쩌면 가장 깊숙한 혈관 어딘가에 숨겨놓은 뜨거운 핏덩어리 같은 처절함 일지도 모르겠다.



스무 살에 나의 다이어리에 적어 놓은 목표가 있었다.

한 분야에서 성공한 커리어 우먼이 되기.

성공의 척도를 따로 정하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소위 말하는 기업의 잘 나가는 직원으로 인정받는 모습을 기대했던 것 같다.


서른 하고도 수년을 보낸 나는 딱히 이룬 것은 없지만

은근히 지킬게 많아졌다.

그래서 새로운 목표를 이루고 '달성'으로 체크하는 대신, 나에게 중요한 것을 적고 기억하는 것으로 페이지를 채웠다. 신기하게도 의미 없는 목표, 목적들이 자동으로 지워졌다. 소위 찐 목록만 남아서 나의 목표 리스트는 건강하게 다이어트를 성공한 셈이다.




그렇게 나의 1번 목표는

부끄럽지 않은 엄마로 살아가기가 되었다.

우선순위가 바뀌었다.

우선순위를 변경하는 것

가치관이 바뀐다는 것

고집을 꺾는 것

계획을 변경하는 것다.

그리고

어른이 되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나를 기특하게 여기는 시간을 갖다.




위대하진 않지만 적어도 부끄럽지 않은 엄마가 되는 시간은

반쪽 주부로서 일과를 끝낸 밤에 시작한다.



워킹맘의 밤은 매일신한다.


미처 끝내지 못한 직장의 연장선.

아픈 아이를 케어하는 24시 엄마센터.

멈춘 것 같은 성장판을 두드리듯 키보드 소리 가득한 독서실.

그러다가 너무 지친 날은

혼자 그냥 멍 때리는 무념무상의 밤.

혹은

덩그러니 굴러다니는 빈 맥주캔 소리만 요란한 고민의 동굴.



나는 특히 일기 쓰는 밤을 좋아한다.


일기에 남겨진 부끄럽고 찌질한 이야기들은 아프고 외로운 흔적이다.

그러나 수십 장 중 한두 군데 숨어 있는 자기 위로와 응원의 도약이 내심 기특하다.

나만 아는 기특함이라 더 특별하다.

그렇게 용기를 내어

기특하게 부끄럽지 않은 엄마가 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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