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향수를 뿌리는 이유

완벽주의 워킹맘의 취향 사수 에세이

by 헤이란


처음 향수를 쓴 건 대학생 때였다.


대학교를 입학하고도 여전히 학생이어서 그랬을까.

난 아주 기본적인 화장품만 챙겨 바르고 다녔다. 향수에 관심도 없고 무슨 향수가 있는지도 몰랐다.

같이 있는 사람에게서 좋은 냄새가 나면, 그냥 향이 좋은 화장품을 쓰나 보다 생각했다.


어느 날, 지인에게서 향수를 선물 받았다.

명품 향수는 아니지만 나와 비슷한 느낌이라서 어울릴 것 같다고.

부담 없이 써보라고 준 향수는 내가 받은 가장 나와 닮은 첫 선물이었다.

그날부터 나는 그 향수를 쓰기 시작했다. 그냥 뭔가 다른 사람이 나를 만날 때 그 향을 같이 맡아주었으면 했다.



즐겨 쓰는 향수가 있으니 좋은 점도 생겼다.

좋아하는 게 뭐예요?이라는 질문에 뻘쭘하게 긴장하지 않는다.

평소에 향수를 쓰는 분들께 고마운 일로 선물을 할 때 주저 없이 향수를 고른다. 향기가 주는 매력을 알기에 아깝지 않다.



향수는

그 사람을 기억하는 단서이다.

그 사람과의 순간을 멈추게 하는 버튼이다.

그리고 내가 지금 이 순간의 나를 자각하는 주사위*이다.

과제 발표 날,

입사 면접 날,

결혼식 날도 나는 그 향수와 함께 했다. 여느 날과 똑같이 오늘도 잘 될 거라는 주문을 외우듯.





*영화 '인셉션'에 등장하는 아서의 주사위. 현실을 확인하는 토템.








아이와 같이 그림을 그린다. 아이는 36가지 색연필을 모두 꺼내며 묻는다.

엄마는 어느 색을 가장 좋아해요?

흠. 대답이 바로 나오지 않는다. 생각해보니 딱히 선호하는 색이 없. 늘 상황에 따라 적당히 무난한 색을 골라 버릇해서일까.



아이는 색연필 통을 책상 위에 다 쏟더니 연필들을 쪼르르 키 세워 나열한다.

난 밝은 파란색이 좋아요. 이것 보세요. 가장 작지요. 너무 좋아서 눈동자에 머리카락에 매일 이 색으로 칠했더니 이렇게 몽당 색연필이 되었어요.

아이의 최애는 몽당연필이 되어 어느새 손가락에 아담히 안겨있었다. 아끼고 쓰고 더 아껴서 쓸 거란다.



나의 최애는 무엇일까.

본격적으로 색을 골라본다. 검정? 노랑? 내가 가진 것들의 색을 떠올린다. 옷장 살펴볼까. 온통 흑백이다. 좋아하는 색이라 흑백으로 깔맞춤 한아니었을 텐데.



옷장 말고 일기장을 펼쳤다.

검은 글씨들 사이로 삐죽삐죽 얼굴을 내민 너는 누구냐. 파랑. 랑. 기억하고 싶은 글은 파랗게 쓰고 노랗게 강조해 놓았다. 그래, 이거다. 엄마도 파란색 좋아하고 노랑도 좋아해.






향수를 뿌리는 이유는

글을 쓰는 이유와 닮았다.

내가 그런 분위기로 기억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고

스스로 그런 사람이 되겠다는 의식이다.

향수를 뿌리면 내가 바라는 나로 각성한다.

글을 쓰면 글 쓰는 나로 각성한다.



파란색으로 힘주어 쓰고

노랑으로 옷을 입힌 문장들은

내가 지칠 때 다시 읽어볼 나의 흔적이다.

그때의 나를 찾아가 다시 지금의 나로 돌아오기를 반복할 것이다.

출근길을 나서며 향수를 뿌리는 순간

나는 나로 무장할 것이다.



최애가 있어서 다행이다.

아이의 몽당연필을 가지런히 놓는다.

이를 장 닮은, 아이가 가장 아끼는 시간을 그리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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