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불구하고 발리는 조금 의외의 장소였다. 특히나 출장으로 발리라니. 7시간을 날아서 새벽에 늦은 체크인을 했다.
'밤비행기는 역시 별로야. 여행은 역시 피곤해'
이곳에서의 첫 대사였다.
하루 정도 시간이 생겼다. 어디라도 가야 할 것 같아서 호텔 직원에게 물으니 택시를 불러준다. 여기에서 가장 멋진 일몰을 볼 수 있는 곳이 있다길래 '콜'했다.
공항 근처 번화가를 벗어나면 도로는 아담한 왕복 2차선이다. 인도네시아의 다른 도시는 어떨지 모르겠다. 호텔을 벗어난 이후로 쭉, 내가 본 발리의 도로는 왕복 2차선 도로였다. 어릴 적 가족여행을 다니며 부지런히 찾아다닌 국도의 풍경을 닮았다.
향수에 젖을 무렵, 2차선 도로는 낡은 자동차와 그 틈바구니 사이의 오토바이들로 가득 채워졌다. 대중교통수단이 거의 없는 곳이라 관광버스 몇 대를 제외하고는 버스는 한 대도 보지 못했다. 아마도 퇴근하는 사람들, 하교하는 학생들, 혹은 나와 같은 여행자들은 자동차나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는 것 같다.
오토바이에 시선을 뺏긴 채 수십 분을 달리는 동안, 무언가 허전하다고 느꼈다.
신기하게도 도로에 신호등이 없다.
신호등 하나 없는 도로라니. 교통 법규가 잘 지켜질 리 없겠군. 하나, 아무도 끼어들거나 급하게 먼저 가지 않았다. 질서가 없는 가운데 질서가 있다. 볼수록 이상한 곳이다.
마침 그날은 발리의 국가적인 행사가 있어서 많은 행렬들이 거리를 메웠다. 차도인데 사람들은 산책하듯 걷고 있다. 날이 어두워진다. 환장할 노릇이다. 해변에서 노을을 보기로 한 계획은 무너져갔다.
답답한 뒷좌석과 다르게 택시 기사는 평온한 얼굴이다. 그도 엄청 화가 나서 조용한 건가 싶어 슬쩍 표정을 살폈다. 그는 행렬을 보며 웃고 있었다. 나도 결국 포기하고 웃고 만다.
발리에서는 클락션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길 위의 사람들은 서두르지 않았다. 차도, 오토바이도 마찬가지다.
"때"를 재촉하지 않는다. 신을 모시는 인간으로서 그저 받아들인다. 급한 건 나뿐이다. 어쩌자고 일몰을 보겠다고 이 길을 택했을까. 난 택시 차창 너머로 보이는 해를 바라보았다.
이토록 붐비는 도로에서 클락션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클락션을 누른다고 해결될 일이 아님을 모두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택시기사도 답답해하거나 화를 내지 않았다. 기다리면서 해가 지는 하늘을 바라보고, 가끔은 길 위의 사람들과 찡긋 눈인사를 나누기도 했다.
빨리빨리 하자는 내게
이곳은 그저 느긋하고 다정하다.
'빨리' 되는 건 없지만
발리가 역시 '발리'했다.
여행자들은 재촉하지 않는다.
시간에 쫓기고 있다면 진정 여행을 즐기고 있는 게 맞는지 확인해보아야 할 것이다. 발리의 택시, 학생, 길가는 행인 모두 여행자였다.
내가 옮길 수 있는 걸음만큼 부지런히 걷고, 나아갈 뿐. 멱살 잡고 끌고 가지 않으며, 앞사람을 재촉하지 않는다. 길이 나 있는 만큼 걸어가다 보면 바다를 만나고 해가 지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일분일초를 다투며 찾아간 일몰은 과연 아름다울까. 글쎄다.
고백하면, 난 여행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겁이 많고 새로운 시도 하려면 생각이 많아서
새로운 곳에 가려면 필요한 것도, 준비할 것도 많다. - 남편 말을 빌리자면 피곤한 스타일.
물론 그렇다고 여행을 싫어하는 건 아니다. 스스로 '여행러'라고 부르기 힘든 이유는, 내가 여행을 선뜻 나서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행은 어찌 됐든 나를 돌아보는 시간이다.
그리고 나의 주변 또한 조금 다르게 더듬어 본다.
소홀했던 건 아닌지.
부족했지만 행복했음을 깨닫고.
무심하게 건넨다. 수고했다고.
- 발리 누사두아에서 -
어둠이 빛의 부재라면, 여행은 일상의 부재다. - 김영하 작가 <여행의 이유> 중 Part 3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