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들이 모인 어느 저녁, 술잔이 오가는 식사 자리에서 아빠는 내가 처음 태어난 날을 떠올리며 말했다.
“집사람이 임신을 했을 때 주변에서 다들 하는 말이 우리 큰 애가 아들일 것 같다 그랬어. 그래서 친구들에게 아들 낳는다고 얘기를 하고 다녔지. 그런데 딱 낳고 보니 딸인 거야. 그날 속상해서 소주를 마셨어. 지금 생각해보면 그럴 것도 아닌데 말이야.”
아빠는 그날을 회상하며 껄껄 웃었다.
방에서 놀고 있던 나는 그 대화를 우연히 들었다. 앞뒤로 어떤 대화가 오고 갔는지는 모른다. 나는 순간 미치도록 서운했다. 한편으로는 억울했다.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황급히 다른 방으로 뛰어갔다. 숙제를 하는 척하고 울음을 참았다.
그때 나는 갓 국민학교를 입학한 8살이었다. 아빠는 한 살 어린 남동생보다 조숙하고 눈치 빠른 나를 항상 더 예뻐했다. 아빠는 나의 가장 든든한 사람이었다.
그런 아빠의 과거 속 숨겨진 비밀을 알게 된 것처럼 난 가슴이 쿵쾅 거렸다. 그때 난 결심했다. 내가 딸로 태어나서 속상했던 아빠에게 나의 탁월함을 보란 듯이 보여주기로.
이것은 내가 계획한 가장 철저한 복수였다. 복수의 결론은 물론 명확했다. 압도적인 승리를 얻는 것이다. 마치 이런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네가 태어나서 정말 다행이다. 딸이 최고야."
나는 가장 부지런하고 성실한 자식이고 손주가 되기 위해 무엇이든 열심히 했다.
비즈니스 식으로 표현하면 탁월한 딸로 포지셔닝하고 브랜딩 하기 시작했다.
아빠를 이기기 위한 과정은 험난했다. 난 늘 일찍 일어나고 숙제로 알아서 다 해야 했다. 학교 성적은 당연히 좋아야 했고, 남동생보다 뭐든지 잘해야 했다. 가족의 칭찬은 늘 내 차지였다. 그것은 칭찬을 넘어서 기대였고 신뢰였다.
나를 신뢰하지 않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아빠를 압도적으로 이길 때까지 나는 더 성장하고 완벽해야 했다.
식구들이 다 같이 모여 뉴스를 보고 있었다.
2005년쯤이었다. 세상은 무섭게 바뀌고 있었다. 당시 난 기성세대의 가르침에 불만이 많았다. 막상 어른이 되어 진짜 사회로 나와보니 쉬운 게 하나도 없었다. 뉴스 자막은 온통 정치가 어떻고 경제는 어떻게 살리자는 이야기로 분주했다. 가족들이 서로 이런저런 의견을 주고받는 데, 나는 유독 아빠를 이기고 싶었다. 그래서 아빠의 의견에 반론을 내고 머리를 짜내서 장황한 근거를 달았다. 가방끈 길고 책을 더 많이 읽은 젊은 대학생의 논리는 얼핏 보면 다양하고 신선했다. 아빠는 굴하지 않고 여유 있게 본인의 입장을 이어 나갔다.
토론은 길어졌다. 외교는 이렇고 정책은 이래야 하고.....
나는 긴 시간을 두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다 어느 순간 내 감정에 못 이겨 울컥 화가 났다. 울분에 차서 말을 마구 쏟아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다 안다면 왜 세상을 이 모양으로 만들어 놨나요. 기성세대가 우리보다 옳다고 착각하지 마세요."
거실에 차가운 냉기가 돌았다. 잠시 정적이 흐르고 아빠는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 네 말이 맞다. 세상은 참 어려워. 네가 말한 대로 해야만 너희가 행복해진다면 네가 옳다."
뭐지.
나는 당신을 이기기 위해 논리를 만들었는데 당신은 그저 내가 행복하면 된다며 말하고 웃어 넘기 다니.
아빠는 정말 치사하고 나쁘다. 난 이겼지만 졌다.
내가 열을 내며 지켜보던 미래는 순식간에 현실로 다가왔다.
뉴스를 틀었다. 꼬마가 말한다.
"엄마, 정치가 뭐야?"
"정치? 음, 그건, 음..."
백과사전을 검색해서 제대로 알려주려다 문득 아빠가 했던 말씀이 떠올랐다. 곰곰이 생각하다 이렇게 말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