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할 때 비벼먹어요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 사수 에세이

by 헤이란

냉장고 문을 열어보니 반찬이 마땅치 않다.

젓갈처럼 축 늘어진 콩나물, 살짝 과하게 쉰 깍두기.

친정에서 들고 올 때만 해도 상태가 좋았는데 식객을 오래 기다리다 지쳤는지, 모습이 처량하고 불쌍하다.


딱 내 꼴이 그렇다.

야근 릴레이에 지칠 대로 지쳐서 딱히 먹고 싶은 것도 없다.

업무는 끝이 없고, 평가는 냉정하고, 물가는 미쳤다.

몸은 힘든 데 살이 찐다.

아마도 나는 냉장고 안에서 살고 있었나 보다. 식은 죽 먹기처럼 쉬운 게 아니라, 식은 반찬처럼 영혼이 없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먹자니 억울하다. 배달 어플을 꼈다. 그리고 바로 껐다. 무엇을 고르고 주문하는 것 마저도 버거운 그런 날이다. 눈치 없는 뱃속은 꼬르륵꼬르륵 노크를 해댄다.


그래서 이제 어쩌지. 무얼 먹지.

문득 아빠가 떠오른다. 아마 내게 이렇게 말하겠지.


애매하면 그냥 다 비벼 먹어봐.


지금이 딱 그런 적당히 애매한 상황이다.

일단 대접부터 꺼내볼까. 천근만근 몸뚱이를 달래서 주방에 왔고, 기억을 더듬어 상을 차린다.




20년 전 주 6일 근무를 하던 어느 평범한 저녁도 그랬다.

그날도 9시 남짓한 퇴근시간에 맞춰 할머니는 나물을 무친다. 주방은 아빠의 귀가 시간에 맞춰 고소한 밥상 초벌을 시작한다. 아직 끝나지 않은 누군가의 저녁을 기다리는 시간이다. 아빠가 현관문을 들어서자 냉장고에 대기 중이던 반찬들이 다시 입장한다.


아빠는 비빔에 남다른 애정을 가졌다.

일단 반찬이 어느 정도 모이면 어찌 비빔을 완성할지 고민에 빠진다.

나물이 있으면 잘근잘근 입에 감겨서 좋고, 오이나 무채를 넣으면 아삭아삭 씹히니 경쾌하다고.

별 다른 밥상도 아닌데 아빠는 늘 싱글벙글 웃으며 군침을 삼킨다.

밥을 차리는 사람이든 같이 밥상을 기다리는 사람이든 절로 미소를 띠게 했다.


특히 달걀 후라이가 준비된 날은, 예외 없이, 고추장을 꺼내고 참기름을 넣어 밥을 비볐다.

화룡점정이 이런 것일까. 참기름을 마지막에 넣고 비비는 마지막 몇 초는 가장 설레는 순간 중 하나일 것이다.

아빠는 그날도 어김없이 밥 숟가락 하나 가득 참기름을 둘렀다.

아빠의 숟가락은 군무를 지휘하듯 힘 있고 섬세했다.

일주일이 넘도록 인기가 없는 잔반들은 그렇게 웃음 가득한 밥상에서 주인공이 된다.


나와 동생은 이미 한 끼 배불리 먹고도 그 밥상이 부러워 아빠 옆에 앉아 "나도 한 입 주세요" 하고 입을 크게 벌리곤 했다.

그렇게 고단한 그의 하루는 고소하게 버무려져 식구들 밥공기에 나눠 담겼다.




Today's special moments are tomorrow's memories.
오늘의 특별한 순간은 내일의 기억들이다.
- 영화 '알라딘' 중



비빔밥은 참 너그럽다.

무엇이든 거절하는 법이 없다. 일단 드루와.

동네 아이들 모두 모인 흥겨운 놀이터처럼 풍성하다. 어우러지니 행복하다. 소외될 틈이 없어서 더더욱.


나는 특히 고추장과 올리고당을 섞어 만든 양념장을 곁들인다. 매콤 달콤한 드레싱은 이름 그대로 고추'장' 답게 리더십을 발휘한다. 오합지졸도 여기에선 훌륭한 비빔 군단이 된다.


비빔밥은 딱히 레시피가 없다. 그래서 참 편하다. 변덕스러운 입맛도 여기서는 뻣뻣하게 굴지 않는다.

그날 입에 넣고 싶은 걸로, 싶은 만큼,

그날 답답했던 만큼, 마구 쉐이킷 하고

수저로 동그랗게 떠먹으면 된다.


양념장에 참기름을 쓱 둘렀다.

엄마표 반찬들이 반짝반짝 되살아났다. 망한 하루가 윤기를 찾고 되살아난다.

한 그릇을 뚝딱 비우고 나니 배는 부르고 마음은 여유롭다. 때로는 단순한 레시피가 큰 감동을 준다. 되는 것 하나 없는 절대 망한 하루에 비빔밥은 유일하게 실패하지 않는, 믿고 먹는 메뉴다. 누구나 하나쯤 간직하고 있을 치트키.


설거지를 할 때 녀석의 진가가 완벽히 드러난다.

대접과 수저로 설거지 끝. 이렇게 완벽한 밥상이 또 있을까.

잘 먹고 간편하게 마무리했다. 일도 관계도 삶도 이렇게 비비는 대로 흘러간다면.

오늘 나의 하루도 비빔밥답게, 너그럽게, 간단하게, 실패 없이, 고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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