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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이란 Apr 15. 2023

4/11 우리는 모두 마트에 산다

필사적인 필사일기 -  <H마트에서 울다>


나는 지난 5년 사이 이모와 엄마를 모두 암으로 잃었다. 그러니 내가 H마트에 가는 것은 갑오징어나 세 단에 1달러짜리 파를 사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두 분에 대한 추억을 찾으려고 가는 것이기도 하다. 두 분이 돌아가셨어도, 내 정체성의 절반인 한국인이 죽어버린 건 아니라는 증거를 찾으려는 것이다. 그런 내게 H마트는 도무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기억, 항암치료로 머리카락이 다 빠지고 뼈만 남은 엄마의 몸과 하이드로코돈 복용량을 기록하던 기억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준다. 대신 두 분이 그 전에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떠올리게 해준다. 아름답고 활기찬 모습, 고리 모양의 달콤한 짱구 과자를 열 손가락에 끼고 흔들어대던 모습, 한국 포도를 먹을 때 껍질에서 알맹이만 쪽 빨아먹고 씨를 훅 뱉는 법을 내게 가르쳐주던 모습을.

<H마트에서 울다> 미셀 자우너 저/ 정혜윤 역






어제는 일찍 업무를 정리하고 아이와 길을 나섰다. 아이 치과 진료를 미룰 수 없어 오후 시간을 비운 것이다. 아이는 대낮에 엄마와 길을 걷고 있으니 오늘이 꼭 주말인 것 같다며 몇 번이나 날짜를 확인했다. 치과 진료를 마치고 나와 아이는 동네 마트로 향했다. 아이는 미소를 감추지 못한 채 폴짝폴짝 뛰며 걸었다. "치과 씩씩하게 가서 상주는 거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삐 풀린 영혼은 아이 뿐이 아니었다. 나 역시 모처럼 이른 저녁부터 거실에 늘어져 있을 생각에 덩달아 긴장이 풀렸다. 일단 먹고 싶은 거 다 골라보자. 아이는 감자칩과 초코송이와 초코하임을 골랐고 나는 '-깡'으로 끝나는 과자들과 짱구, 그리고 꼬깔콘을 집었다. "엄마는 항상 새우깡이랑 짱구를 같이 고르네?"

"있잖아, 짱구에 새우깡을 끼워서 먹으면 맛있어. 제대로 '단짠단짠'이야."

아이는 엄청난 사실을 깨달은 얼굴로 꼬깔콘에 끼울 과자를 찾기 시작했다. 우리는 빼빼로가 코깔콘과 어울린다는 사실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 아이와 나는 계산하는 순간까지도 과자의 궁합을 논하며 쉴 새 없이 떠들었다. 정말 마트는 언제 와도 질리지 않는다.


집에 들어온 우리는 이 기분을 최고로 만들어줄 콘텐츠를 고르기 시작했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을 재생했다. 소장용으로 VOD를 구입했던 나를 칭찬했다. 저녁 밥을 차리지 않기로 했다. 어쩌다 한 끼쯤 과자로 때우면 어때. 우리는 새우깡과 짱구, 꼬깔콘과 빼빼로를 짝 지어, 조합을 몸소 실현했다. 단짠 놀이가 한창일 때, 퇴근한 남편은 바로 분위기를 파악하고 재빨리 옷을 갈아입고 아이 옆에 앉았다. "오늘은 과자 파티하는 날이구나." 남편은 열심히 과자 봉지를 뜯어 접시를 채웠다. 아이는 또 묻는다. "오늘은 왠지 좀 특별한 월요일인 것 같아."

과자 몇 봉지로 얻는 특별함이라니. 여전히 월요일이다. 그래도 괜찮다. 가슴 뛰는 내일이 없을지라도 아이와 나눌 볼거리, 먹을거리, 살아갈 거리만 있다면, 노을만 남은 저녁이어도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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