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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이란 Apr 12. 2023

4/5 나의 아름다운 취향들

필사적인 필사일기 - <나의 아름다운 할머니> 

물론 나는 그동안 많이 웃었다. 아이를 낳은 것이 행복했고 엄마가 된 것이 신기했다. 꿀짱아를 보면서 많이 웃었다. 하지만 내 웃음은 무언가에 많이 짓눌려 있었다. 엄마 노릇을 해야 한다는 부담과 잘하고 있지 않은 것 같다는 위축감, 아이를 기르다가 내 인생이 실종될 것 같다는 조바심, 여러 가지 무거운 맷돌들에 짓눌려  웃음은 쾌활하지 않고 어딘가 찌그러져 있었다. 

검은색 얼룩이 있는 하얀 강아지와 놀아준 그날 놀이터의 우레탄 바닥에서 나는 잃어버린 퍼즐 조각을 찾았다. 사랑한다는 것, 좋아한다는 것의 원래 모습. 몸을 낮추고, 손으로 바닥을 두드리고, 데굴데굴 구르고, 입이 찢어지도록 웃는 것. 만지고 부비고 냄새 맡고 즐기는 것. 내가 강아지를 보자마자 자동으로 쉽게   있었던 것. 딸에게 그동안 해주지 못한 것.

아이를 낳고서도 1년이 넘도록 찾지 못했던 퍼즐 조각을 찾아 들고, 나는 그토록 단순한 것을 그렇게 오랫동안 까맣게 잊고 있었다는 것에 스스로 놀랐다. 앞으로는 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짜릿한 기분으로 꿀짱아를 다시 보았다.

네가 강아지라면.

벌써 다 해낸 기분이었다.  


<나의 아름다운 할머니>, 심윤경 저




퇴근하고 집에 들어서면 아이는 기다렸다는 표정으로 나에게 안긴다. 엄마 우리 역할 놀이해요. 아이는 역할을 몇 가지 정해서 내게 준다. 엄마는 이거, 나는 요거. 오늘 내게 온 배역은 '슬라임 놀이는 좋아하지만 예의가 없는 밉상 친구'. 나는 온 힘을 다해 역할에 몰입했다. 10초마다 소위 '현타가 오지만' 내색은 하지 않았다. 한참 대사를 주고 받던 중 아이가 말한다. "엄마 이 놀이 하기 싫어? 왠지 그래 보여."

나는 망설였다. 솔직하게 말하려니 아이가 실망할 것 같아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아이는 머뭇거리는 나를 보더니 갑자기 다른 놀이를 찾는다. 사실은 자기도 이 놀이가 기대보다 재미가 없다며 주섬주섬 역할 놀이를 마무리한다. 내 마음을 들킨 게 아닐까.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보드게임을 펼쳤다. 내가 좋아하는 '루미큐브'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게임을 했다. 아이는 자신의 승리를 기뻐했고 나는 내 스타일의 놀이를 해서 기뻤다. 아이는 잠자리에 들기 전 숙제라며 일기장을 펼쳤다. 아이의 일기를 몰래 보지 않기로 약속을 한 터라 멀찌감치 물러섰다. 참지 못하고 묻는다. 오늘 일기는 무슨 내용을 쓸거야? 제목만이라도, 아니 힌트라도 줘. 아이는 져주는 표정으로 답했다. "나도 엄마도 좋아하는 루미큐브" 

찌그러진 웃음은 취향을 만나 비로소 만개했다. 보드게임을 하듯 오늘을 즐길 것이다. 카드 게임 속 조커처럼 완벽하게, 때로는 한 판 역전을 꿈꾸는 승부사처럼, 취향을 가득 발라, 듬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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