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화가의 밥상 24
전시 중에 전화가 왔다.
오랜 세월 때마다 나를 초대해
맛의 세계로 인도한 친구 부부.
집에 회 먹으러 오라는 것으로 보아
전시회를 그렇게 축하하고자 함이다.
전시 관람 중인 모녀 손님과
같이 가도 되겠냐고 물어보니
흔쾌한 오케이.
모녀 손님이란,
어머니는 정신건강과 원장 출신이고
딸은 마케팅인가 경영학인가를 하는
성격이 유달리 시원시원한
유학 준비 중인 학생이다.
인생은 타이밍이라 누가 말했던가.
그 모녀는 그날 타이밍이 좋았던 것이다.
어디서 그런 식사를 맛보겠는가 말이다.
본인들도 대만족임을
식사 중 연신 감탄으로 표현했다.
로제 와인은 컬러도 연했지만
맛 또한 신맛이 덜해 부드러웠다.
내 척 보고 알았다.
누런 동그란 것이 숭어알인지.
숭어알 말린 것은
알 입자가 작고 독특한 맛에
남대문 시장에 건어포점에 가서
사 먹곤 했던 품목이다.
파는 숭어알은 때깔이 거무튀튀하다.
이것은 노르스름하니 투명하기까지 하다.
직접 만들었음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래서 짜지 않고 고급스럽다.
회를 담당하는 남편 요리가는
도미를 먼저 썰어 낸다.
이어서 생새우
그리고 입가심하면서 맛보라고
무 한 조각.
그날의 특별한 횟감은 역시
광어 지느러미였지 싶다.
그 꼬득꼬득 씹히는 식감에
너무도 산뜻한 살맛.
일본말로는 '엥삐라'라고 한단다.
다음은 요리가가
뭘 주섬주섬 꺼내서 풀어댄다.
숙성을 위해 다시마에 싸서 보관하는 것을
'곤부 지매'라 한단다. 곤부는 다시마.
다시마 보자기에서 나온 것은 연어였다.
관자 오투살은
조갯살을 띠어내고 관자를 띠어내고도
마지막까지 붙어 있던 놈이다.
그만큼 질기지만 씹는 맛을 준다.
식탁 꽃병에 뭔 아스라한 꽃이 꽂혀있다.
뭐냐고 물어보니 고수란다.
관상용으로도
심심풀이로 뜯어먹기에 좋은 거다.
한국에는 밥도둑이란 말이 있지만
일본에는 술도둑이란 말이 있단다.
술도둑을 일본말로 슈도라 한단다.
일본 3대 슈도는 다 젓갈류란다.
해삼 내장젓(고노와다)은
미식 요리가 친구 부부를 통해
알게 된 지 오래고
이번에는 회를 참치 내장젓에
찍어 먹어 보라고 아지회와 내어 놓았다.
디저트 타임에는
우메보시(매실절임)가 등장하고
우메보시는 일본 기주 산이 최고라고
귀띔해 준다.
여러 종류의 회를 맛보느라
정신없는 가운데
와인은 계속 바뀌어 가며 따졌다.
집 설계할 때 와인 창고를 주방 밑에 둔
이유가 다 있었던 것이다.
디저트에 빠질 수 없는 것이 치즈다.
단단하지만 담백한 고다치즈를
묵직한 것으로 쳐서 썰어 놓았다.
이 프라이빗 주방의 특징은
일본식 회를 기반으로
이태리와 스페인의 자상함이 함께하고
한식으로 입가심을 해준다는 것이다.
마지막에 삶은 사태고기와
국수를 내놓았는데
국수는 먹느라 정신없어서
사진을 못 찍었다.
국수는 제일제면소의 풍국면이
구하기 힘들어서 그렇지
점성이 제일 좋단다.
다 먹었다 싶었는데
유럽식 소화제인 푸스 카페(독주)로
60년 된 미국 산 위스키를 권한다.
아버님께 물려받았다는
귀하디 귀한 위스키.
평소 검소함에서 나오는
풍족함이 있는 멋쟁이 부부의 환대에
같이 간 모녀는 어쩔 줄 모르게 좋아했다.
그 또한 보람 있는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