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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희 Aug 07. 2019

강진 - 사의재 10

답사





[부뚜막과 구들 문화]



우리 것을 찾는 과정은 가려내는 과정이다.

역사가 긴 만큼 가려내기가 쉽지는 않다.

기준이 필요한데, 기준은 가장 오래된 것일수록 우리 것일 가능성이 높다. 

오래전에 가장 앞서 있던 문화가 동이족 문화였기 때문이다.

'음양오행 사상'은 그 대표적인 것 중의 하나이다.



음양은 양이 좋고 음이 나쁘다 그런 단편적인 것이 아니다.

음과 양 다 동등한 가치를 부여했다.

환경에 있어 가장 음인 것은 물이고 가장 양인 것은 불일 것이다.

우리 조상은 물이고, 불이고를 가리지 않고 잘 다스리는 지혜가 있었다.

그래서 중국 고대서에서는 치수를 동이족에게서 배워

나라를 안정시켰다고 나온다.



물만 잘 다스린 것이 아니라 불 다루는 기술 또한 좋았다는 것은 

도자기 굽는 가마나 부뚜막 그리고 대장간의 화로를 보면 알 수 있다.

불을 잘 다스리는 것은 고대에는 쇠를 생산하는 고급 기술이었기에

국력과도 상징되는 일이었다.

비파형 동검, 민무늬토기, 고인돌을 통해 고조선의 세력 범위를 추정할 수 있다.

특히 청동 거울의 기술은 

요즘도 제작이 불가능할 정도로 세세한 잔 선 무늬로 이루어져 있다.

새긴 무늬는 고조선에서 쓰던 원. 방. 각을 새겼다.

선의 수 13,300개, 선의 간격 0.0001밀리미터 오차가 없다.

2500년~3000년 전 이런 청동 거울을 만든 기술은

세계에서 오직 고조선 밖에 없다.

이어서 가야는 철을 다루는 기술로 유지되던 나라이기도했다. 

고조선이나 가야는 당시 최첨단 하이테크의 기술을 가진 나라였다는 것이다.



그 이전의 만주의 홍산 문명 시대의 옥 가공기술이 

고스란히 청동기 철기 기술로 이어졌다는 것이 미술사학계의 주장이다.

옥은 가장 단단한 물질이기에 요즘도 가공이 용이치 못하다.

현실적으로 얘기하자면 그 당시가 지금보다 더 뛰어났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기에 한국의 미술사학계나 미학계는 역사학계와 다르게 진실을 주장한다.

그들은 자료와 증거를 갖고 있으며 논리도 있으며 또한 거짓되지 않고 양심적이다.

식민사관에 오염되지 않았기 때문이고

다행히도 밥줄과 관계가 없는 전문 직책이었기 때문이리라.

한국 문화의 마지막 보루(堡壘)는 미술사학계나 미학계이다.






전문적인 옥 가공 기술이나 섬세한 청동기 제작 기술은 차치(且置)하더라도

온돌방 정도는 우리의 상상으로 추론해 볼 수 있겠다.  



나무대로 다른 나무 한 점에 비벼 마찰을 일으켜 불씨를 살려 

불 피우는 것은 가능하다. 나무든 짚이든 솔가지든 탈 것만 있으면 된다.

그리고 물을 데우려면 돌 틈에다 불을 지피면 된다.

이제는 연기가 문제다. 연기를 한쪽으로 뽑아내려면

나무 넣는 쪽과 연기 나가는 쪽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막는다.

그것이 '부뚜막'과 '굴뚝'이 된다.



부뚜막이란 말은 '불을 두어 막은 곳'이란 뜻에서 유래되었지 싶다.

연기를 더 멀리 뽑아내려면 굴뚝을 가로로 길게 뽑으면 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돌구멍 길을 만들어야 한다.

고래를 길게 쌓아 '구들장'을 얹으니 '구들'이 되었다.



구들이 길어지니 부뚜막에 불을 지펴도 연기가 아궁이로 나온다.

연기가 긴 구들을 통과해 굴뚝으로 잘 빠져나가게 하려면

어찌해야 하나 하고 연기를 연구하게 된다.

온기가 상승하는 성질이 있기에 구들골의 밑바닥을 비탈지게 하면

연기가 위쪽으로 가므로 연기를 굴뚝으로 유도할 수 있다.

그리하여 완성된 것이 이름하여 '쪽 구들'이다.



고구려 고분 벽화에 쪽 구들 부뚜막 그림이 보인다.

기다란 쪽 구들 부뚜막에서 그 당시 난방의 생활상이 보인다.

좌식이 아닌 입식 생활이다.

신라 때는 경주에서 숯으로 난방을 했다 한다.

숯으로 난방을 했다는 것은 방안에 화로를 놓고 잤다는 뜻이다.

지금도 일본 료칸에 가면 다다미 방에 화로가 놓여 있다.

학계에서는 이것들은 다 부분 난방이라고 정의한다.



쪽 구들 위는 따뜻했다.

추운 날은 기다란 구들 위에서 자면 따뜻하게 잘 수 있었다.

너도나도 그 자리를 차지하려 했다. 부부가 자려면 좁았다.

쪽 구들에서 두 쪽 구들로 넓힌다.

애들을 낳으며 식구가 늘어나니 더 늘려야 했다.

아예 방의 바닥 전체에 구들을 놓게 된다.

이렇게 해서 '구들방'이 된 것이리라.



아궁이는 하나나 둘인데도 온기가 오래가지 않는다.

온기를 보존하기 위해 방법을 써야 했다.

구들 앞과 뒤를 턱을 높여 연기만 빠져나가고 열기가 새는 것을 막았다.

그래도 더 열기를 가두는 방법은 없을까?

이번에는 아예 구들 앞뒤로 바닥을 파서

열기를 더 가지고 있을 공간을 만들었다. 

그것을 '개자리'라고 한다.



이제 되었다. 연기는 잘 빠지고 온기는 보존이 더 되어

방도 따뜻함이 전보다 더 오래간다.

구들방은 이제 따뜻한 돌방이 된 것이다.

'온돌방'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온돌 문화'는 다른 나라에는 없다.

온돌방은 온기가 상승하는 특성상 바닥부터 난방이 되어

부분 난방보다 훨씬 효율적인 전체 난방이다.

신체도 아래쪽이 따뜻하면 그 열기가 위로 올라가 몸에도 좋다.

몸에 한기가 들었거나 지져야 할 때 부뚜막 신세를 안 져도 되게 되었다.



이제는 온돌이 좋은 것이 증명되어 중국 아파트에도 많이 보급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방바닥에 몸을 지지는 의미와 그 맛을 그들은 앞으로도 모를 것이다.

뜨거운 돌이나 물속에 들어가서 시원하다 하고 

뜨거운 국물을 떠먹으며 시원하다 하고 감탄하는 민족은 우리밖에 없다.

그런 지지는 맛을 우리는 알기에 우리의 '찜질방 문화'가 정착하게 되었다.

근래에 '찜질방 문화'는 새로운 우리만의 한류 문화가 아닐 수 없다.






여름에는 계곡으로 피서 가고

겨울에는 찜질방에서 한파를 이겨낼 수 있게 되었다.



우리 어려서는 더운 날 집에 오면 제일 먼저 한 것이 '등목'이었다.

좀 갖춘 집은 펌프가 있었다. 수돗물보다 펌프 물은 더 차가워서 부러웠다.

등목이란 말에 노하우가 숨겨져 있다.

선조들은 사람의 체온을 관리하는 중추신경계는 목 뒤에 있다는 것을 간파한 것이다.

쉽게 더위를 이기는 작은 지혜가 아닐 수 없다.

일하는 아저씨들이 목에 수건을 두르고 있는 것도

땀을 닦으려는 목적 외에 찬물에 적셔서

목 뒤의 체온 스위치를 낮추는 의도도 있었던 것이다.

들으면 쉽지만 더운 날 막상 이것을 하고 있는 사람을 요즘 보기 드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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