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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희 Jul 21. 2021

1-3, 페르시아 양식의 모스크 b

화가의 심미안과 통찰력으로 본 '핵심 서양 미술 이야기'





중세 미술 (476~1400) AB






1. 이슬람 건축 미술


모스크

1-3, 페르시아 양식의 모스크 b






옛 몽골 제국의 영광을

티무르 제국(1370년 ~ 1507년)








14세기 후반 

서(西) 차가타이한국(汗國) 출신의 티무르는 

몽골 제국의 재건을 기도했다. 

그는 1370년에 사마르칸트에 도읍하고

동서 차가타이한국을 병합하였고, 

일 한국과 킵차크한국을 접수했으며

북인도에 침입해 델리의 재물로

사마르칸트를 부흥시켰다.


이어 1402년, 

오스만 튀르크를 앙카라에서 격파해 

구(舊) 몽골 제국의 서반부를

통합 및 회복하는 대제국을 건설했다. 

티무르는 명(明)의 정벌을 기도했으나 

원정 도중 67세에 병사했다.


이에, 티무르 제국의 수도인 사마르칸트는 

국제적인 상업 도시로서 번영하여 

왕년의 바그다드를 능가할 정도로 번영했다. 

예술·문화면에서는 이란 문화의 영향이 강하고 

티무르풍(風)의 이슬람 문화가 발달했다. 




사실, 티무르 제국은

건국자인 티무르 당대에만 통일된 제국이었을 뿐,

티무르 사후엔 마치 칭기즈칸 사후 

몽골 제국처럼 유목민족의 분할상속제도에 따라

여러 아들들과 손자들에 의해 분할되었다.

그래서 티무르 사후의 '티무르 제국'이란

티무르의 후손들에 의해 통치된 

이란과 중앙아시아 일대에 동시에 난립한

여러 티무르 계열 국가들의 총칭에 가깝다.




대부분의 왕조가 그렇듯이 티무르 사후에 

왕위 상속을 놓고 대판 싸움이 벌어졌다. 

티무르는 생전에 손자 피르 무함마드를 

후계자로 임명했지만, 

내분으로 나라 자체가 막장이 될 뻔했으나, 

티무르의 넷째 아들 샤 루흐가 

지배권을 장악했고 티무르 제국을 다시 통합했다. 

샤 루흐는 자신의 근거지 헤라트를 

중심으로 제국의 재건을 꾀했다.

역사가들도 샤 루흐의 시기를 

진정한 전성기로 쳐주고 있으며, 

유럽과 동방의 문물들을 받아들이고 

이들 사이의 교역을 중계하면서 

상당한 번영을 누렸다.


샤 루흐가 헤라트를 수도로 하는

호라산 지역을 다스리는 동안,

그의 아들 울루그벡은 

사마르칸트를 중심으로 한 트랜스옥시아나

지역을 40년 간 다스렸다. (1409-1449)







티무르 제국은 티무르라는 

한 의지가 강한 사람의 작품이다.

한 개인의 능력으로 그렇게 넓은 땅을 차지한 사례는

32개 나라를 정복하고 총 65번의 회전에서 승리한

칭기즈 칸의 개국공신인 수부타이 외에는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티무르의 수많은 전투 중

인상적인 장면이 몇 가지 있다.

오스만의 술탄 바야지트 1세와의 앙카라 전투도 

그중 하나이다.

술탄 바야지트 1세는 

천부적인 군사적 재능을 바탕으로 한 

신속하고 과감한 용병술로, 번개라 불렸다.

그는 13년간 재위하며 

제국의 영토를 2배로 늘려놓는, 

오스만 역사상 전무후무한 속도의 정복을 이루었다. 

비록 첩보전에 능한 티무르에게 패배했지만

그의 셀주크 튀르크계 기마부대와

친위부대는 실로 용감하고 막강했다.


흔히 티무르의 군대와의 전쟁에서 패하고 

티무르에 의해 감금당한 일화 때문에 

술탄 바야지트 1세가

티무르 최대의 라이벌이라는 식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 티무르의 최대 라이벌인 인물은 

죽을 때까지 티무르와 가장 많이 대립했던 

인물이자 티무르와 악연이 깊은 인물인 

킵차크한국의 칸이었던 토크타미쉬 칸이었다.

티무르가 코크타미쉬에게 킵차크 칸 자리를

되찾게 해 주었지만 토크타미쉬는

티무르 뒤통수를 치다가 모든 것을 잃는다.







당당한 티무르와 포로로 잡힌 오스만 술탄 바예지트 1세






또 하나 티무르의 인상적인 전투는 델리 침공이다.

델리가 부유하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쳐들어가서

막강한 코끼리 전차부대를

낙타 등에 짚을 쌓아 묶고 불을 질러 낙타를 돌진시켜

코끼리를 겁먹게 하는 전술로 승리를 거두었다.

델리에서 금은보화도 획득했지만

코끼리 부대도 접수해서 다른 전투에서 써먹기도 한다.





이 대목에서 튀르크족을

다시 한번 생각 안 할 수 없다.

몽골족이 러시아(루시) 원정을 할 때

바이칼의 튀르크계인 타타르족과 같이 해서

300년 간 지배하며 유럽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고

티무르 군대도 대부분 튀르크계로 용병을 썼었다.

튀르크계는 그만큼 널리 퍼져 있으면서

잘 싸우는 민족이었다.


티무르의 튀르크 군의 기세와 더불어

티무르 전쟁 수행 자세는 

몽골식의 공포 살육 전술보다 한술 더 떴다.

몽골식은 항복하면 살려주었지만

티무르는 항복해도 전체를 도륙해서 해골 탑을 쌓고

생사람을 벽에 발라버렸으며

도시 자체를 지도에서 지워 버렸다.

그의 원정은 점령을 원한 원정이 아니라

살육과 말살을 위한 원정이었다.









티무르 제국의 수도

사마르칸트 







사마르칸트는

호레즘 제국 시절에도 수도였고

실크로드 주요 거점 중 하나이다.

물이 풍부한 오아시스이기에

확장하는 이슬람 군의 목표가 되기에 

충분한 곳이었다.


712년에 이슬람군이 사마르칸트를 점령한 뒤,

이곳 최초의 모스크를 세웠다.

751년의 탈라스 전투가 끝난 뒤에는

포로로 잡힌 중국인 제지 기술자가

사마르칸트에 오게 되었는데,

759년 이슬람 세계 최초의 제지 공장이 운영되며

사마르칸트는 제지업으로 명성을 날렸다.


10-12세기에 권력이 셀주크 튀르크 등을 거치고

1220년 칭기즈 칸의 몽골군의 침입이 있었다.

이들이 사마르칸트의 생명줄인 운하를 막아 버리자,

사마르칸트 인들은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몽골군은 도시를 약탈하고,

주민들을 학살하였으며,

많은 수의 기술자들을 몽골로 데려가 버렸다.



1370년에 티무르는

사마르칸트를 자신의 제국의 수도로 삼았다.

그는 자신이 정복한 지역으로부터

장인들을 데리고 와서

사마르칸트를 아름답게 꾸미게 하였다.

티무르의 궁전인 Kok Serai는 요새 안쪽에 위치했다.

하지만 그는 도시 밖에서의 생활을 선호했고

비단과 태피스트리로 

호화롭게 치장한 천막에서 살았다.






티무르 사후, 후손인 바부르는 1512년에

세 번째로 사마르칸트를 장악하는 데 성공하였으나

우즈베크족은 이내 이 도시를 수복하였고

바부르는 인도 델리로 가서 무굴 제국을 세운다.


바부르는 아버지를 통해 티무르의 피를 이어받았고,

그의 어머니를 통해 칭기즈 칸의 피를 이어받았다.

바부르의 혈통은 차가타이-튀르크계에 속했으나,

주변의 환경, 문화, 교육 등은

페르시아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에

그는 그 문화를 존중했고,

이는 페르시아 문화가 

인도에 전파되는 계기가 되었다.

또, 페르시아 문화는 그로 하여금

훌륭한 문학적, 예술적 기질과

사료 편찬 기술을 갖추게 해 주었다.


1530년 바부르가 사망하자, 아들 후마윤은

옆 나라 페르시아 사파비 제국에 망명 후

사파비 2대 황제 타흐마스프의 도움으로

무굴 제국 2대 황제 제위를 계승하였다.








무굴 제국의 초대 황제 바부르









비극의 티무르 여인

비비하눔 모스크(1399년~1404년)








'비비하눔(Bibi-Khanum)'이란

티무르가 가장 사랑한 중국인 왕비의 이름으로,

그녀는 인도로 원정을 떠난 티무르를

깜짝 놀라게 해 주기 위해 페르시아의 건축가에 의뢰해

이 거대한 사원을 지었다고 한다.

티무르가 돌아오기 전까지 완공시키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는데

그때 왕비를 남몰래 사랑하던 건축가가

왕비가 자신에게 입맞춤을 해준다면

완공시켜 주겠다고 했다.


기가 막힌 비비하눔은 색깔이 칠해져 있는

달걀들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여기 이 달걀들이 겉모습은 달라도 

깨 보면 다 똑같듯이, 여자도 다 똑같아요.

괜한 마음 품지 마시고 어서 일을 하세요."


그러자 건축가는 빈 잔들을 갖다 놓고 말했다.


"여기, 한쪽에는 물을,

다른 한쪽에는 술을 부어 보세요.

겉모습은 똑같아도 하나는 마시면 시원해지는 반면,

다른 하나는 마시면 취하게 되지요.

사랑은 그런 거랍니다."


그리하여 키스하게 되고,

젊은 건축가가 비비하눔의 볼에 키스 마크를 내고.


티무르가 돌아와 기적 같은 모스크에 감격했으나

키스 마크에 화를 못 참고,

누구를 처형했다나 도망갔대나

누가 미나렛 꼭대기에서 떨어져 죽었대나

차도르를 쓰게 했대나

그런 얘기가 있다.



















레기스탄 광장의 

울루그벡 신학교와 모스크

(Tilla Kori Madrasah)



울루그벡은 티무르의 손자이다.

그는 과학이나 문화, 예술에 관심이 많아서

천문대를 짓고 여러 학자나 예술가를 초빙하여

그들의 활동을 장려했고 많은 건축물을 세웠다.

울루그 벡 본인도 빼어난 천문학과

수학에 천재적인 재능을 보인 학자이기도 했다.

그는

"학문을 연마하는 것은 무슬림의 의무이다."라는

글을 남기기도 하였다



레기스탄 광장에 울루그벡 신학교가

바로 이 울루그벡이 만든 신학교이다.


울루그벡 신학교는 1417-1420년에 세워졌다.

이곳에서 그는 직접 천문학 강의를 했다고 한다.

천문학에 대한 그의 관심은

이 건물의 장식에서도 나타나는데

입구에는 밤하늘의 별자리가 표현되어 있다.

외벽의 모자이크와

유럽 마졸리카 패널의 원조격인 유약 타일 패널을

꽃과 아라비아 문자를 모티브로 하였으며,

가장 돋보이는 것은 별 모양의 도형 안에

꽃무늬가 들어있는 기하학적인 기리흐 양식이다.

두 개의 미나렛의 상부는

벌집 모양의 무카르나스 양식으로 마무리되어 있다.



























































































울루그벡 천문대









우리나라에 세종대왕이 있다면

사마르칸트에는 울루그벡이 있다.



세종대왕이 1397년 ~ 1450년 활동했고

울루그벡은 1394년 ~ 1449년 활동했으니

시기적으로 겹친다.

과학을 사랑했던 둘이 만났다면

통하는 게 많았을 듯. 

울루그벡의 천문표는

세종에게도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세월이 흘러 울루그벡에 대하여 알게 된 

근대 시기 서구권 천문학자들은 경악했다. 

지동설로 유명한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보다 

더 정확하게 항성 거리를 측정하였고 

온갖 천문학 및 수학 연구에 대해서도 

엄청난 재능을 보였기 때문이다. 

19세기에 이러한 게 드러나서 

독일 천문학자 폰 마들러는 

달에 난 화산 분출구를 발견하자 

울룩벡이라고 이름을 지어 그를 기렸을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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