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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희 Oct 26. 2021

무굴 건축 양식

화가의 심미안과 통찰력으로 본 <핵심 미술 이야기>

화가의 심미안과 통찰력으로 본

핵심 미술 이야기





튀르크가 세운 무굴 제국


티무르 제국 시대에 

인도의 델리가 티무르에게 털리고

티무르 사후에

티무르의 후손인 바부르가 

인도 델리로 밀려와 무굴 제국을 세운다.


티무르나 바부르의 가계도를 보면

둘 다 튀르크 계 아버지와

몽골 칭기스 칸 계 어머니 쪽의 피를 받았다.

반쪽 몽골계요 튀르크 계에 더 가깝다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들 군사들은 거의 모두 튀르크 계였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튀르크 인의 정체를

파악하고 갈 필요가 있다.

실질적으로 튀르크 계가 세계 역사에 미친 영향이

몽골 못지않게 광활하기 때문이다.

몽골은 중국과 러시아와 지금의 이란까지 

맹위를 떨쳤지만

튀르크는 중국 대신 바이칼 호수부터  

북아프리카와 인도까지 그들의 영역이었다.





흉노 > 훈 > 헝가리


중국 북쪽으로는 몽골과 카자흐스탄으로

이어지는 너른 초원이 있었다.

그 땅의 첫 주인은 흉노였다.

기원전 2세기에 등장한 흉노는 

몽골 초원에 유목 제국을 세운다.

흉노가 얼마나 강했던지 견디다 못한 진시황은

만리장성을 쌓아야 했고, 

한나라를 세운 유방은 막대한 조공을 바쳐야 했다.


흉노는 400여 년간 중국보다 강한 세력이었다.

그러다가 한무제의 공격과

내분으로 결국 망하게 된다.

이후 흉노는 역사에서 완전히 사라진 듯 보였다.

하지만 실제로는 200여 년에 걸쳐

조금씩 조금씩 서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그리고 4세기에 갑자기 유럽에 나타나

유럽 전역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는다.

바로 훈족이다.


그리고 이들은 헝가리를 만든다.

헝가리는 몽골어로 항아이로

'항'은 '넓고 큰'이란 뜻이고

'아이'는 '지역이나 나라'를 뜻한다.

항아이 > 헝가리는 의미상 한국이다.


이로 인해 겁에 질린 게르만의

민족 대이동이 일어났고,

그게 결국 한차례의 서로마 멸망을 불러왔다.





바이칼 호수 강가에서 터키까지

1천 년간 8천 km 

튀르크의 대장정



         







튀르크의 역사


흉노가 비운 대초원에 홀연히 나타난 게

돌궐이다. 6세기의 일이다.

흉노의 일파인 돌궐이 이동을 한 것이다.

그들은 여러 면에서 흉노보다 훨씬 더 강했다.

대부분의 유목 국가는

들풀처럼 일어났다가

바람처럼 사라진다.

문자가 없어서 기록이 남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돌궐은 달랐다.

이들은 곳곳에 비문을 세워

자신의 문자로 역사를 남겼다.

중국 중심의 사관에 익숙한 우리가 

관심이 없었을 뿐

돌궐의 발자취는 그래서 아주 뚜렷하다.


한 돌궐 비문에는

"사방에 군대를 보내

머리를 가진 자는

머리를 숙이게 하고,

무릎을 가진 자는 

무릎을 꿇게 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말 그대로이다.

돌궐은 단시일 내에 흉노의 경계였던

파미르 고원을 넘어 카스피해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유목 제국을 만들어냈다.

이는 중국 전체와 맞먹는 크기였다.

실크로드를 장악한 돌궐은

중계무역으로 부를 쌓았다.

당시 중국 중원의 수나라도, 그를 이은 당나라도

돌궐과 군신 관계를 맺고 조공을 바쳐야 했다.




싸우는 재능은 타고났지만

유목민의 약점은 늘 결속력이 약하다는 것이다.

오랜 세월 손쉬운 이동을 위해

국가가 아닌 가족 단위로,

혹은 부족 단위로 생활해온 탓이다.

돌궐은 흉노와 마찬가지로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분열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당나라의 집요한 이간책으로

동서 돌궐로 나눠지게 된다.

분열된 돌궐은 당나라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이렇게 해서 오아시스를 연결한

초원의 대제국은 겨우 200여 년 만에 무너진다.

돌궐이 약화된 데는 7세기 초에 전래된 

불교도 한몫한다.

살생하지 말라는 가르침 때문이다.

이에 돌궐 지배층은 불교를 막으려 했다.

하지만 늘 종교는 막으면 막을수록 퍼지게 된다.




유목민의 단점은

결속력이 약하다는 점이나

대신 생명력이 길다는 장점이 있다.

곳곳에 흩어져 살기 때문에

나라는 무너뜨릴 수 있어도

국민은 없앨 수는 없다.

때문에 돌궐이 사라진 초원에서

나중에 몽골, 거란이 나올 수 있었다.


어쨌든 패망한 돌궐인들 중

일부는 중국에 동화되고

일부는  새로운 땅을 찾아 서쪽으로 이주한다.

게르만 민족 대이동을 능가하는 

튀르크족  대이동이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튀르크의 서진은 흉노와는 달랐다.

흉노가 유럽으로 갈 때에는 

대초원에 그들을 막아설 자가 없었다.

하지만 튀르크가 이동할 때에는

중동에 이슬람이 들어서고 있는 중이었다.


당시 중동에는 중세 이슬람의 황금시대를 연

아바스 왕조의 세력이 막강했다.

튀르크 인들은 살아남기 위해 용병이 된다.

그리고 이들은 탈라스 전투에 투입된다.

탈라스 전투는

중동의 아바스 왕조와 동양의 당나라와의

대륙의 격돌로

세계사적으로 엄청난 의미의 전투였다.

당나라 군대를 이끈 이는 고구려 출신의

고선지 장수였다.

8세기(751년)에 서진하던 당나라와

동진하던 아바스 왕조는 드디어

오늘날의 키르기스스탄에 있는

탈라스 강에서 만나게 된다.

결과는 튀르크 용병이 합세한 이슬람의 대승이었다.

이 패배로 중국은 서쪽으로의 팽창을 

완전히 포기하게 된다.

중국이 영향력을 잃음으로

오늘날 중앙아시아는

그 넓은 땅이 모두 이슬람이 되었다.


이 전투는 튀르크의 운명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아바스 이슬람 왕조로부터

전쟁 수행 능력을 인정 받음으로 해서

한동안 용병 생활을 계속 영위한다.

무엇보다 튀르크의 변신은

이슬람을 받아들인 것이다.

이는 단순히 종교의 문제가 아니었다.

쉽게 흩어지는 유목민의 습성을 버리고

종교로 단단히 뭉쳐진 튀르크 민족으로 

재탄생하게 된 것이다.




그 사이에도 튀르크 인들의

중동 유입은 계속되었다.

특히 10세기의 백두산 화산 폭발로

초원이 황폐해지면서 튀르크 인들은 

대거 고향을 떠나 속속

이슬람화 된 튀르크 인이 되어갔다.

그리고 튀르크 인들이 지나간 자리엔

점차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아제르바이잔 등의 나라가 생겨났다.


이런 과정을 거쳐 튀르크 인들은 마침내

11세기 초 셀주크 튀르크(1037년)를 세운다.

중동의 전 지역을 석권하는 엄청난 크기의 

이슬람 제국이다.

셀주크 튀르크는 돌궐 제국과는 완전히 달랐다.

이 유목 제국은 영토 점령보다는

교역을 통한 경제적 이득을 취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점령된 영토를 다스릴 역량 자체가

부족했기 때문이고 현명한 처신이었다.




이들은 비잔틴 제국을 꺾음으로써

오늘날의 터키 대부분의 지역을 장악했다.

그리고 예루살렘 등 기독교 성지를

지배함으로써 십자군 전쟁을 불러왔다.


탈라스 전투에서 이슬람과 중국 문명권의

충돌 한복판에 섰던 셀주크 튀르크는

이번에는 이슬람과 기독교 문명 충돌의 

선두에 다시 서게 된 것이다.

셀주크 튀르크는 돌궐의 유목 제국보다도

수명이 짧았다.

오랜 십자군 전쟁을 치르느라 힘이

소진된 상태에서 막강 몽골 제국의

침입을 맞았기 때문이다.

셀주크 튀르크가 200년도 안 돼 

문을 닫았지만 튀르크의 생명력은

결코 꺼지지 않는 들불 같았다.

몽골이 물러나자 튀르크는 또다시 부활,

이번에는 더 큰 오스만 튀르크 제국(1299년)을

만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15세기(1453년)에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하면서

천년 제국 로마를 완전히 역사 뒤로 보내 버렸다.


오스만 튀르크는 유럽, 아프리카, 서아시아에 걸쳐

옛 동로마 제국의 영토 대부분을 차지한다.

이들은 돌궐 유목 제국과 셀주크 튀르크를 합친

것보다 훨씬 더 긴 600년간이나 세계 최강국으로

군림했다.

하지만 오스만 튀르크 제국도 

1차 세계 대전의 패전국이 되면서 수명을 다했고

1923년 오늘날의 터키 공화국으로 재탄생하게 된다.

그리고 이들은 자신의 역사를 

다음과 같이 교과서에 싣는다.


"우리의 조상은 중앙아시아 초원의 흉노다.

그리고 돌궐은 튀르크의 이름으로

건설한 최초의 국가다.

우리는 천 년 동안 8천 km를 걸어서

이곳으로 왔다.

장소는 달라졌지만 이런 역사로 보아

터키의 건국 연도는 돌궐이 나라를 세운

552년이다."






중세와 그 이후 미술 

(476 ~ 1400 ~)



1. 이슬람 건축 미술



1526 년 우즈베키스탄의 바부르(Babur)는

북부 인도의 무굴 제국(Mughal Empire)을 설립했다.

무굴 제국은 16세기 초부터 19세기 중반까지

오늘날의 인도 중부와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에

이르는 지역을 지배한 이슬람 국가이다.

페르시아 양식의 건축이 들어와

인도식 페르시아 양식인 무굴 양식이 되었다.



모스크의 기본적인 구성 요소는

돔과 아치와 미나렛이다.

이 세 가지의 차이를 알면

페르시아식과 인도 페르시아 양식인

무굴 양식을 구분할 수 있다.



회교 사원의 돔은 무굴 시대에는

대개 3 개의 돔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후기에는 힌두식으로 큰 중앙 타워의 돔과

사방에 4 개의 더 작은 돔이 있는

5 개의 돔형 건물로 바뀌어 간다.


16 세기 후반이 돼서는 

페르시아의 마스터 건축가들은

무굴 제국에 더블 돔을 도입하게 된다.

돔 상부에 다른 돔을 하나 더 겹침으로써

마치 뚜껑이 있는 것과 같이 된 것이다.

이 진보된 기술이 인도 페르시아 양식을 낳았다.

결국 페르시아의 건축은 인도 무굴 제국 시대에

새로운 창조를 이루게 된 것이다.


그리고 미나렛이나 건물 상부에 얹힌

장식으로 쓰인 수많은 작은 돔들은

기둥만으로 지탱되는 오픈식

정자 타입이라는 점이다.

정자 타입은 바람이 통과되어 

극히 친환경적이라

보는 이의 숨통을 트이게 해 준다.



아치

인도식 페르시아 양식의 특이점은

우선 아치가 페르시아의 아치보다

더 뾰족한  '뾰족아치'라는 점일 것이다.

아치의 실루엣에

음각의 작은 둥근 주름들이 잡혀 있다.



미나렛

미나렛의 표면에도

양각의 둥근 잔 주름이 잡혀 있다.

이것은 페르시아가 벽돌과 타일과 석회를

많이 쓰는 건축 공법인 것에 반해

인도는 전통적으로 돌을 기반으로 돌조각을

하는 건축 스타일임을 입증한다.






무굴 건축 양식



인도 최대의 모스크

자마 마스지드 (1631 ~ 1656)







자마 마스지드 모스크는 

샤 자한(1628년 ~ 1658년)이  세웠다.


‘샤 자한’이란 페르시아어로

‘세계의 왕’이라는 의미이다.

그는 바부르, 후마윤, 악바르, 자한기르의

뒤를 이은 5번째 무굴 황제이다.





자마 마스지드 모스크는

인도의 델리에 있는 2만 5000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인도 최대의 모스크이다.


건축 자재는

인도에서 흔한 적색 사암과 

흰 대리석을 주로 사용하였다.


형식은 아랍 모스크의 패턴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지만

페르시아 양식을 따르고 있고

내 외장에서는 인도의 문화 특색이 엿보인다.






















아그라의

타지마할 모스크
















샤 자한의 왕비 영묘

타지마할 (1632년 ~ 1653년)


타지마할 양쪽으로 모스크와 집회소가 있다.





타지마할(Taj Mahal)은 인도 북부

아그라에 있는 무굴 제국 제5대 황제 샤자한이

1631년에 사망한 왕비 뭄타즈 마할을 위해

건설한 대리석 영묘(靈廟)로

인도 이슬람 문화의 대표적인 건축이다.

마할은 궁전이란 뜻이고

타지마할의 뜻은 궁전의 왕관이다.




뭄타즈 마할은 출산 중 출혈과다로 사망했다.

그녀는 유언의 하나로

후세에 남는 무덤을 소망했다.

39세의 샤자한의 수염은

완전히 하얗게 쉬어 버렸다.

샤자한은 타지 마할과 쌍을 이루는 형태로

야무나 강을 사이에 둔 건너편에

검은 대리석으로

자신의 묘를 만들려고 했다는데,

이는 실현되지 않았다.




22년의 건설 기간 동안

항상 2만 명의 사람들이 공사에 참여했다.

건축 자재는 인도 전체에서

1,000마리 이상의 코끼리로 옮겨졌고,

대리석은 라자스탄 지방의 자이푸르 산이라고 한다.

옥이나 결정은 멀리 중국에서

터키석은 티베트에서

사파이어와 유리는 스리랑카에서

감람석은 이집트에서

산호와 진주조개는 아라비아에서

다이아몬드는 분델칸드에서,

자수정과 마노는 페르시아로부터 모아졌다.

이외에도 벽옥은 펀잡 지방에서

청금석은 아프가니스탄에서

홍옥은 아라비아에서 들여온 것이라고 한다.

전체 28종류의 보석 보옥이 박혀 있었다.





타지 마할 건설의 의의


힌두교는 무덤을 만들지 않고,

시신은 화장되어 유골과 재를 강에 흘려보낸다.

이슬람교도의 무덤은

영혼은 영원하다고 생각에 간소하다.

이에 반해 무굴 왕조의 황제는 큰 무덤을 갖추었고

이것은 군주의 권세를 나타내는 목적이 있었다.

하지만 권력을 잡았던 것도 아닌

단지 왕비를 위한 장대한 묘지(墓廟)가

건설된 예는 거의 없었다.

타지 마할 착공 시절 샤자한은

힌두교를 억압하는 령을 발하는 등

이슬람 국가 건설에 착수했다.

타지 마할은

무슬림의 정신적 지주로 구상되었다.


성자 신앙은 이슬람과 힌두교 모두에서 보여져서,

성자의 묘소에 영력이 깃들어 있다는 생각이

무굴 왕조의 인도에서는 강했다.

뭄타즈 마할을 성자로 간주한 그 바탕에는

이슬람 사회가 여성에게 남편에 대한 사랑과

자식을 이루는 것을 요구하고,

출산에 의한 죽음은 남성이 성전에서 죽는 것과

같은 것으로 여겨져서,

생애 14명의 아이를 낳고 36세에 죽은

그녀가 순교한 성자가 되기 충분했다고 할 수 있다.


이 뜻에 부합하기 위해 타지 마할은

순례자를 받아들이는 시설을 가지게 되었다.

방문 중에 메카를 향해 예배하는 모스크,

식사와 숙박을 위한 집회소 등이 그런 시설이다.

타지 마할이 완성되었을 때

그 아름다움에 샤자한은 다음과 같이 시를 읊는다. 



"여기가 

죄를 지은 사람이 회한하고

죄의 행위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용서받아 깨끗해질 

우아한 전각으로,

신의 빛과 함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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