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을 움직인 사람들
아스테카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
아즈텍은 들어는 봤을 것이다.
아스테카가 아즈텍이다.
아스테카는 우리에게 생소하다.
그런 면에서
국립중앙박물관 학예관들의 전시 기획을
인정 안 할 수가 없다.
박물관의 전시 기획은 파리에서부터
뛰어나다는 것을 알았었다.
파리지엥들은 문화 수준이 높아
이런 기획 전시가 뜨면
한동안 파리 전체가 들썩인다.
그리고 만나는 사람마다
그 얘기를 화제에 올린다.
한국도 대형 전시 공간들도 많아졌고
국민들 눈높이도 높아졌다는 것을
이건희 컬렉션으로 확인했다.
그러나
우리하고 관계없는 낯선 기획 전시는
아직이다 라는 생각이 든다.
난 낯선 전시는 돈 벌러 간다는 생각을 한다.
내가 자비를 들여 찾아다니면
그 비용이 얼마나 들지 계산해 보면
얼마나 돈을 많이 벌었는지 답이 나온다.
16세기까지는 베링 해협이 없었다.
아시아 대륙과 아메리카 대륙이 붙어 있었다.
1만 2천여 년 즈음부터 아시아인들이
새로운 터전으로 넘어갔다는 설이 있다.
인종의 생김새나 언어와 문화를 들여다보면
타당성이 있는 설이다.
아스테크 유적은 기원전 200년부터 건립되어
10~20만 명의 인구를 자랑하던 도시였으나
계속된 가뭄으로 7세기경
사람들이 모두 사라지고 폐허가 되었다.
1200년에 멕시코 일대를 지배하던
톨텍 족이 멸망하고 톨텍의 수도였던
툴라도 폐허로 변하게 된다.
이로 인해 북방에 살던 민족들이
멕시코로 이주하게 되는데,
이 중 가장 늦게 이주한 종족이
바로 아즈텍인들이었다.
그들은 싸움과 전쟁에 능했고,
약탈을 주로 하고 살았다.
그들은 1300년부터
한동안 톨텍족의 노예 상태로 살아갔으나,
그 용맹함과 잔인함으로 인해
금세 멕시코 지방의 지배적인 종족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그리고 1325년, 텍스코코 호수의 섬에
진흙뻘들을 개척해서 단단한 땅으로 만들고,
테노치티틀란(지금의 멕시코시티)이라는
새 수도를 만들게 된다.
그 새 수도에 신전을 만든다.
그리고 세력을 키우기 위해
신에게 제사를 지내야 했다.
신에게 바칠 신성한 물건을 바치기 위해
옛 유적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기존 유적에서 발굴한 유물들은 신에게 받쳐졌다.
그 유적들이 지금의 아스테카 유적이다.
현재 아스테카 유적에 붙여진 이름들은
전부 아즈텍인들이 명명한 것이다.
그러하니,
아즈텍 문명은 아즈텍인들이 만든 것도 아니요,
유물 또한 아즈텍인들이 제작한 것도 아니며,
내용 역시 정확하다 할 수 없다.
이 기획 전시에서는
아즈텍 문명에 있어 주요한 피라미드는
거론조차 되고 있지 않다.
현재 발굴된 피라미드로는
태양의 피라미드 외에도 달의 피라미드 및
크고 작은 11개의 피라미드가 있으나
발굴 안 된 피라미드의 1/10 정도라 한다.
앞으로 땅에 묻혀 있는 유적들을 더 발굴되어야
그 진위를 알 수 있다 하겠다.
콜럼버스의 탐험은
새로운 무역처 개발이라는 업적을 세웠지만,
잔혹한 식민화의 출발점이기도 했다.
콜럼버스가 최초의 정착지인 쿠바는
뒤이어 온 정복자들의 베이스캠프가 되었다.
콜럼버스는 금을 찾는데 실패하고
이후 스페인 정복자들은 금을 찾기 위해
정복에 나선다.
스페인 정복자 중에 대표적인 인물은
쿠바 총독 밑에 대륙 탐사 대장
'에르난 코르테스'였다.
그에게
16세기 아메리카 대륙의 중심지 중 하나인
아스테카 문명의 수도 '테노치티틀란'이
대표적인 대상이었다.
'테노치티틀란'은 텍스코코 호수 안,
섬 한가운데에 있었다.
둘레 10여 킬로미터의 정방형 도시이다.
아스테카 멸망 원인은
부족 간 원한 및 무기의 차이 그리고 천연두였다.
전쟁보다 천연두로 죽어간 원주민이 더 많았다.
식민지화된 후 100년간,
2500만 명의 이었던 아스테카 인구가
250만 명으로 줄었다.
테노치티틀란에는
약 20만 명의 인구가 살고 있었다.
런던, 파리가 1700년까지 10만 명 정도로
유지했었으니 상당한 인구였다.
테노치티틀란 지도(1524)
아스테카 문명의 수도 '테노치티틀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