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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균. 허난설헌 생가

고건축의 미

by 이승희



고건축의 미



강릉은
역사적으로
여성들 중에 인물을 배출한 지역이다.
오죽헌에서 신사임당,
초당 지역에서 허난설헌.
이러한 사실은
강릉이
여성을 차별하지 않았던 분위기임을 시사한다.


허균과 허난설헌의 아버님은 허엽이다.
허엽은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문신으로,
동인의 영수였다.
허엽은 동인과 서인 간 당파 싸움의 여파로
파직당한 후 강릉 삼척부사로 좌천(1563년)됐다.
그의 호는 초당이다.
초당은 억새나 짚으로 지붕을 만든
조그만 집을 의미한다.

그는 집 앞의 약수로 콩을 불리고
간수 대신 깨끗한 바닷물로 두부를 만들게 하여
초당두부를 개발한 인물이다.
초당두부는
미네랄이 풍부한 바닷물을 이용하기 때문에
콩의 풍미가 살아난다.








허균. 허난설헌 생가터


허균. 허난설헌 기념공원의 외원은

천혜의 자연을 끌어안은 원림이다.

원림에 펼쳐지는 키 큰 적송림(해송)은

여느 한옥에서는 보기 드문 풍경이다.

감동을 주기에 충분하다.




담장 안의 주거 공간으로 들어가는 문은

세 곳이다.

사랑채로 들어가는 솟을대문,

안채를 위한 대문,

사랑채와 안채 사이에 우물가로 가는 문.





사랑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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솟을대문




허균. 허난설헌 생가는

ㅁ자 가옥이다.

가옥의 내원 밖으로 다시 ㅁ자 담을 두른

ㅁ자 정형의 한옥이다.

1/4이 사랑채이고

나머지는 안채이다.


사랑채는 대감마님의 공간이다.

안채와 분리되어 있지만

식문화는 안채에서 지원되는

합리적인 공간 개념이다.


솟을대문 왼편으로 행랑채 방 굴뚝이 보인다.

다른 한옥의 행랑채에서는 보기 드문 경우이다.

이것으로 이 한옥의 보존도가

양호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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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랑채 머슴 집과 곳간



행랑채 머슴 집치고는 방도 부엌도 꽤 큼지막하다.
곳간의 규모도 있는 것으로 보아
허 씨 집안의 경제 규모를 짐작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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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랑채 배면과 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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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채



품위 있는 사랑채이다.
전면 네 칸 중 오른쪽 두 칸은 마루이고
왼쪽 두 칸은 구들방이다.
그것은 마루에 있는 문짝들을 들어 올려붙이면
ㄱ자로 두 면이 뚫린 시원한 정자 같은 마루가
된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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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채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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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채 우측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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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채 우측 마당 뒷담



담 안쪽인 내원에
멋진 배롱나무(간지럼 나무)가 있다.
여름에서 가을까지 묘한 붉은 배롱꽃이
지속적으로 피고 지면 풍취가 볼만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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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채와 안채를 구분하는 담





안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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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채 앞마당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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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채



안채도 사랑채와 같이 오른쪽 두 칸이
마루로 되어 있다.
방 수는 적어지나 방도 마루도
두 칸씩 붙어 있으니
크게 쓸 수 있는 장점이 있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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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채 부엌



부엌이 상당히 크고 천정도 높다.

아궁이가 네 개나 된다.

뒷마당으로 통하는 문도 나 있어

장작 보급이나 물 긷는 활용도를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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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채 뒷마당






우물가로 나 있는 샛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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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물로 가는 사랑채와 안채 사잇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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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물로 향하는 샛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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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맛이 좋았다는 우물




왜 우물을 집 안으로 넣지 않았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긴다.

추론해보건대,

우물은 다른 이와도 공동으로 사용해서라고 본다.

이 가옥이 정녕 특이한 점은

물을 긷기 위해 드나들었던

사랑채와 안채 사이에 난 통로가 있다는 것이다.

부엌에서 안채 뒤꼍을 통해

우물가 문을 통과하면 되는데

안채 뒷마당에 왜 굳이 담을 쌓았을까?

종들도 남녀유별을 지키게 하려는 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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