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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희 Jul 22. 2022

전쟁에 휩싸인 중동의 나라들 1

화가의 심미안과 통찰력으로 본 <핵심 미술 이야기>

화가의 심미안과 통찰력으로 본

<핵심 미술 이야기>






근대부터의 중동 상황 3




전쟁에 휩싸인

중동의 나라들 1



중동이란 말부터 맘에 안 든다.

중동은 영국의 시각에서 붙인 이름이다

하지만 고착화되어 딴 도리는 없다.


제1차 세계대전 패전국인 터키에는

민족주의 인물이 출현하여

마무리 전쟁들을 잘 해내고

바로 새로운 정부를 출범시킨다.


제1차 세계대전 승전국인 영국은

중동을 마음대로 할 수 있게 되었다.

영국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수에즈 운하였고 석유였다.

수에즈 운하가 있는 이집트와

산유국인 이란과 이라크부터 챙긴다.


그리고 칭얼대는 하심가에게는

요르단 등을 띠어 주고

골치 아픈 유대인들은

국제 연합을 만들어 그 국제 기구를 통해

시오니즘을 관철한다.








터키


유럽의 나라들이 전쟁을 많이 치렀지만

오스만 튀르크는 500년 간 평화를 유지했다.


1908년

오스만 튀르크 청년 군인들이

혁명을 일으켜 장악한다.

이때 

오스만 제국의 젊은 지식인들이었던 그들은

유럽이 19세기 후반부터 민족국가를 만들고 

강한 국가가 된 것을 보고

'강한 국가가 되려면 

민족 국가로 뭉쳐야 된다.'는

결정을 내린다.

여러 인종이 섞여 살면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그래서 튀르크족 위주의 

민족주의 성향을 띠게 된다.


이에

아랍 민족이 반발한다.

아라비아 쪽의 명문 하심 가문은

영국과 결탁한다.

오스만 튀르크 제국 안에서

하심가가 반란을 일으켜 주어

튀르크가 망하면

영국이 하심가에게 

아랍 통일 왕국을 만들어주는 것으로.

이 밀약은 대충 협의가 되어 

영국은 아랍 지역을 잘 아는

아라비아 로렌스를 파견한다.




1914 ~1918년에 걸친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오스만 제국, 불가리아 왕국은 동맹국이었다.

전쟁이 패배로 끝나면서,

이들이 해체되게 되었다.




터키의 아버지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


전후 터키 공화국의 건국에는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1881 ~ 1938)라는 

인물이 있다.

오스만 제국의 육군 장교, 혁명가, 작가이며

튀르키예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이다.


그는 제1차 세계 대전 때,

발칸 전쟁 갈리폴리 전투에서 

영국과 프랑스 군대의 공세를 저지한

탁월한 장군이기도 하였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연합국들이 오스만 제국을 침공할 때

전선에 나가 조국을 수호했다.

1921년에 그리스가 

아나톨리아를 침공할 때에는 

사카르야 전투에서 크게 승리를 거두어 

대 그리스 주의를 끝내게 만들었다. 


1923년에는 자신을 지지하는 

청년 장교들과 함께

앙카라를 장악, 술탄제를 폐지하고, 

메흐메트 6세를 폐위시킴으로써

오스만 제국을 무혈혁명으로 멸망시켰다.

1923년 7월 연합국과

새로운 조약(로잔 조약)을 체결하였다.

10월에는 이스탄불에서 앙카라로 천도하고

공화제를 선포하였으며, 대통령에 취임했다.


케말 아타튀르크는

1923년에 대통령에 취임한 뒤

본격적으로 개혁정책을 시행했다.

1924년에는

632년 이래 1300년 동안 이어져 오던 

칼리프제를 폐지하였고, 

터키 공화국의 기본 정신인 

세속주의를 법으로 제정했다.

1925년에는 복장 개혁을 시행하여

여성들의 복장을 해방시키고,

과거에 금지되었던 여성의 교육권을 보장해

남녀평등교육을 시행하였으며, 

이슬람력을 폐지하여

유럽식 그레고리력으로 대체했다.

1926년에는 민법을 개정해 

일부다처제를 금지하고 

일부일처제를 확립하였으며,

1928년에 

튀르키예어의 아랍 문자 표기법을 폐기하고 

로마자 표기법으로 변경하였다.

1930년에는 여성에게도 

선거권을 부여하였다.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는 

터키에서 독립 영웅이자 

국부로서 추앙받고 있다.

터키 국회는 1934년

'터키의 아버지'라는 뜻의

'아타튀르크' 경칭을 수여하였고

공공건물이나 거리의 이름을 

이 명칭으로 바꿨다.

지폐 속의 인물도 

오직 아타튀르크 단 한 명이다.





튀르키예의 제1대 대통령,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





에르도안 대통령의

투르크어 사용국 기구(OTS)


최근 터키의 에르도안 대통령은

과거 투르크어 사용국 기구(OTS)를 결성하고

신경을 쓰고 있다.

OTS는 EU처럼 세계 지정학의 심장부에서

새로운 세력으로 부상하고 있다. 

그 가입국들은 

터키와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아제르바이잔, 키르기스스탄 

5개국으로 구성되어 있다.

헝가리와 투르크메니스탄은 

옵져버로 되어 있다.


중공은 탈레반이 아프간을 장악하자

신장 위구르 독립운동 세력인 

'동투르키스탄 이슬람 운동(ETIM)'이 

같은 수니파인 탈레반과 

테러 전을 일으킬 것에 우려해 왔다.

그런데 이 OTS는 중공에게는

더 크나큰 위협이 아닐 수 없다.

대부분이 투르크계인 신장 위구르 자치주에 

끼칠 영향 때문이다.

중공이 쇠락하는 시점에 독립 전쟁이 

일어날 태세라 할 수 있겠다.


중공이 다급함은 왕위 외교부장이

서둘러 터키의 에르도안 대통령을 만나러

가는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에르도안은 아랑곳하지 않는 모양새이다.

에르두안이 OTS를 결성한 속내는

투르크족 연대를 통한

'21세기 술탄' 등극이기 때문이다.


과거 흉노에 이은 튀르크족(돌궐족)과 몽골족은 

중국에게는 공포 그 자체였다.

돌궐이 가장 강성했던 시기에는

수나라의 수도 장안을 점령하고 

조공을 받기도 했다.

그들은 중국이 통일국가로 강성해졌을 때는

고구려와 손을 잡고 중국에 맞서기도 했다.

745년 후 돌궐이 멸망할 때까지

약 200년에 걸쳐서

돌궐의 침입에 시달려야 했던 중국은

이런 역사적 배경 때문에

돌궐족의 발흥에 대한 두려움과 경계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지금도 그러한 상황이다.

신장 위구르 지역에서 분리 독립운동이라도

벌어진다면 중국은 해체로 이어질

가능성이 농후하다.


신돌궐제국의 부상은

미국과 관계가 소월한 에르도안 대통령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미국을 쥐고 흔들 수 있는

카드이기 때문에 

자신의 명운을 걸고 OTS에 적극적이다.

신장 위구르의 접경 지대인

아프간이나 카자흐스탄

혹은 키르기스스탄을 근거지로

'동투르키스탄 이슬람 운동(ETIM)'의 

세를 키우게 될 가능성이 있다.





요르단


아랍의 전통 가문 하심가는

튀르크 제국 이후의 중동 구도에 

욕심이 있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면 

하심가는 북아프리카를 제외한 아랍 지역을

다 차지할 줄 알았다.

그러나 전쟁 후 실제는 달랐다.


영국은 프랑스와 임의대로 나눈 나라들에

하심가의 아들들을 잠시 앉혔다.

그리고는 영국이 

레바논과 시리아를 프랑스에게 넘긴다.

하심가의 아들들은 쫓겨나고

쫓겨난 왕이 이라크에 가서 국왕을 한다,

레바논과 시리아와 이라크와 요르단과 

이집트는 다 왕국이었으나

다 공화정으로 바뀌고

오늘날 요르단의 국왕만이 

그 하심가의 아들인 채

요르단만 왕정으로 남게 되었다.


영국의 주도하에 

프랑스와 짜고 친 고스톱에

하심가는 말려들어 버린 것이다.

정확히 얘기해서

하심가가 지 욕심에 눈이 어두워 속은 거고

영국은 하심가를 이용만 하고 

사기를 친 것이다.





이스라엘


영국이 1917년에

"팔레스타인은 유대인의 고향이다."라고

'벨푸어 선언'을 한다.

이 선언은 시오니즘이 현실화되는 포문이다.


동시에

아랍 통일 왕국을 바라고

튀르크 뒤에서 반란을 일으켜 왔던

하심가 입장에서는 뒤통수를 맞은 셈이다.


마치 지금 시리아 내전에서

미국 대신 싸우고도 나라를 못 얻은 

쿠르트족의 경우와 유사하다 하겠다.




1947년에 UN은 

팔레스타인 분쟁 지역을 나누고

나라를 둘로 만들자는 안을 내놓는다.

이것은 다투는 애들에게

어른들이나 제삼자가 

으레 강요하는 해결 방식이다.

어른 입장에서는 

허구한 날 싸움을 보는 것은

짜증 나는 일인 것이다.


하지만 아랍인들은

유럽의 골칫거리 유대인들 문제 때문에

남의 땅을 가지고 해결하려 한다고 생각했다.

더 정확히 얘기하자면,

유럽인이 유럽인에게 저지른 

범죄에 대한 보상으로 

아랍인더러 땅을 내놓으라고 한다고 느꼈다.


이 가장 답은 없고 골치 아픈 문제의

명백한 본질은 서구 열강이

우월한 힘을 행사한다는  것이다.

팔레스타인들은 난데없이 

힘센 존재에 잡아 먹히고 있다는 것.

약육강식? 동물의 세계?

사실이 그렇지 않은가.

팔레스타인들은 

유대인들의 약속의 땅에 

태어나지 않았어야 했다.




1948년 5월 15일, 

이스라엘이 건국을 선포한다.

즉시 시리아, 요르단, 이집트의 아랍 군대가

세 면에서 이스라엘을 공격해 들어갔다.

아랍군들은 패하고

팔레스탄인은 사산아가 된다.

팔레스타인 나라가 되기로 했던 영토는

대부분 요르단에 합병된다.

팔레스탄인은

이스라엘에 전쟁으로 빼앗긴 땅에

작은 습격을 감행하는 신세로 전락한다.




1~4차 중동 전쟁 중에 

이스라엘은 프랑스의 도움으로 

핵을 프랑스와 동시에 갖게 된다.

그 이후로는 큰 전쟁은 안 하게 된다.


이스라엘은 

이집트의 나세르 대통령이 죽은 다음에 

이집트의 사다트 대통령하고

1978년도에 평화 협정을 맺는다.

이스라엘이 이집트 하고 화해하고는 

북쪽의 시리아하고 접전이 많고

남부 레바논 지역을 잊을만하면 폭격해댄다.

이스라엘의 주적이 남부 레바논의

헤즈볼라가 된 것이다.


레바논 남부의 헤즈볼라는

레바논 정부가 이스라엘을 막는 조건으로

인정하고 묵인하는 단체이다.

이제는 시아파인 헤즈볼라가 

이란의 지원을 받으며

레바논 정치를 좌지우지하는 역할을 한다.

고로 이스라엘은 이란과도 간접적으로

싸우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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