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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희 Jul 28. 2022

전쟁에 휩싸인  중동의 나라들 2

화가의 심미안과 통찰력으로 본 <핵심 미술 이야기>


화가의 심미안과 통찰력으로 본

<핵심 미술 이야기>






근대부터의 중동 상황 




전쟁에 휩싸인

중동의 나라들 2



제1차 세계대전 후,

레바논과 시리아는 

프랑스가 위임 통치하게 된다.

프랑스는 소수 민족에게 통치를 맡게끔 한다.

그래야 프랑스에게 충성을 한다고 생각한다.







레바논


레바논은 16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근 500년 간 오스만 튀르크와 프랑스의 지배를

받은 바 있다.

그때부터 이어온 전통 식생활과

다양한 요리법이 지금에 이르게 되었고

현재 레바논 음식은 아랍의 대표 음식이자

건강식으로 널리 인정받고 있다.


그 이유로는

첫째, 지중해를 끼고 있어서

         동물성 지방보다 과일, 채소,

         해물을 많이 섭취하기 때문이고 

둘째, 기름기가 비교적 적은 가금류를

          많이 먹기 때문이며

셋째, 마늘과 올리브유를 주로 사용하고

         버터나 크림 등의 사용을 자제한다는

         데에 있다.


결론적으로, 레바논 음식의 가장 큰 특징은

무겁고 인위적이기보다는

자연 본연 그대로의 맛에 중점을 둔다는 것이다.

그래서 소스가 많이 쓰이지 않고

허브나 약초를 주로 사용한다.


레바논은 

중동에서는 유일한 다종교 국가라서

다른 아랍 국가에 비하면 개방성을 내세워

다양한 식문화를 앞서 형성해왔고

중동의 선구자 역할을 할 수가 있었다.



















레바논은 프랑스가 중동 교역로를 위해

탐을 낸 나라이다.

프랑스는 영국과 다르게 

프랑스인들을 직접 이주시켜 

직접 식민 통치를 하려 했다.

그래서 레바논에서는 지금도 불어와 영어를

공통어로 쓰고 있다.




19세기에 들어서자

마론파 기독교도와 이슬람교의 드루즈교도들

사이에 분쟁이 일어나서

많은 기독교인들이 살해되었다.

이 분쟁에 프랑스가 개입한 것을 계기로 

1861년 마론파 기독교인들은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자치권을 획득했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오스만 제국이 패함에 따라 

1920년에 프랑스군이 레바논에 들어왔는데

프랑스혁명 정신에 충실하게도

지주 계급을 약화시키고

대도시 유지들의 기득권을 박탈한다.

하지만 통치할 협조자들을 다 적으로 돌린

결과를 초래한다.

그리고 시리아를 종교에 따라 다섯으로 

분할을 하고 각 종파에게 자치를 허용한다.


지금 레바논의 종교 비율은

이슬람이 6이고 기독교가 4이다.

프랑스는 레바논을 떠나기 전에

레바논을 기독교화하려 했다.

소수 마론파 기독교인들이 대통령을 하고

수니파가 총리하고 이런 식으로 했다.


프랑스가 떠나고

1923년에는 시리아 등과 함께

프랑스의 위임 통치령이 되었다.

그리고 내전으로 비참한 살육을 치르고

1944년 1월에 완전 독립을 달성했다.




1958년 레바논 위기

1956년 친서방파 기독교인 대통령인 

카밀 샤문이 수에즈 위기 당시 

이집트를 공격한 서방국가와 

단교를 하지 않는다.

이에 분노한 이집트의 대통령 

가말 압델 나세르와 대립을 빚으며 

레바논은 이집트와의 긴장이 높아졌다. 

이에 따라 이집트와 시리아는 

아랍 연합 공화국(UAR)으로 연합하였다. 


1958년 7월, 레바논은 

마론파와 이슬람 사이의 내전으로 

위협받고 있었다. 

1958년 이라크에서 7월 14일 혁명으로 

친서방파 정부가 무너지면서, 

내부 소요가 계속되자 

레바논의 샤문 대통령은 

미국에게 개입을 요청했다.




1970년의 요르단 내전 이후

요르단으로부터

수많은 팔레스타인 난민이 유입되어

레바논은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를 중심으로 한

팔레스타인 무장세력의 근거지가 되었다.




남부 레바논에 헤즈볼라가 생긴 후로

이란의 지원을 받는 시아파인 헤즈볼라도 

정치에 개입해서 더 복잡하게 되었다.

지금도

국민들의 강한 시위가 끊이지 않는 나라이다.

그래서

"헤즈볼라는 정치에서 손 떼고

이란은 물러가라."라는 구호도

시위에 등장하게 되었다.





시리아


시리아는

모든 서양 문명과 연결되어 있는 나라이다.

다 시리아의 다마스쿠스를 거쳐 갔다.

다마스쿠스는

지중해 동쪽에 가장 번성한 도시였다.


7세기에 이슬람이 들어와서

이 지역을 장악을 한다.

8세기에 신밧드의 동네인 바그다드로

수도를 이전을 하면서 수그러들었다가

11세기에 십자군 전쟁의 핵심 지역이 된다.

중동에서 십자군 전쟁은 사실,

비중 있는 전쟁 취급을 못 받았다.

한국으로 치면 왜구의 간헐적 침입 정도랄까?


19세기 중엽,

범 시리아에 사는 마론교 기독교인들이 

이슬람 분파인 드루즈족과 싸우다가

기독교도 15,000명 정도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기독교인 보호를 명분으로

1860년 프랑스가 6,000명을 파병한다.

그리고 프랑스가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한다.

해안가를 점유하고 시리아에 실크를 위한

양잠을 재배하게 한다.

먹고살기 힘든 주민들이

그때부터 남미로 가게 된다.


1916년 사이크스ㅡ피코 협정 이후

1920년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서

아래 사진과 같은 분할안을

산레모 회의를 통해 확정을 한다.


당시 영국이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수에즈 운하였으며

배의 운항을 석탄에서 석유로 바꾸는 타이밍이라

석유가 나는 이라크와 쿠웨이트 지역을 

선점하게 된다.

한편, 프랑스는 발을 먼저 들여놓고 있던

시리아와 레바논을 취하기로 하고

위임 통치에 들어간다.










시리아는 프랑스에 투쟁을 하다가

1944년부터 제2차 세계대전으로

프랑스가 힘이 빠진 상태에서

독립을 하겠다고 선언을 한다.

그리고 1946년 프랑스군이 철수를 하면서

독립을 한다.


이집트 나세르의 아랍 민족주의가 흥행할 때

시리아는 이집트와 1958년에

아랍 연합 공화국을 건설한다.

그러나 1967년 이집트가 이스라엘한테 

'6일 전쟁'으로 무참히 깨지고 나서

시리아는 이집트를 믿지 못하게 되어 결별한다.




시리아는 1970년에 아사드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켜

지금 그의 아들 알라위까지 이어서

51년 간 철권통치를 하고 있다.


시리아 국민의 종교 구성은

수니파가 75%, 시아파 10%, 기독교 10%,

나머지 드루즈교이다.

프랑스는 말을 잘 들을 소수파에게 

정권을 맡기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소수인 시아파가 정권을 잡고 있다.


시리아는

아사드 장군의 아들인 

영국 유학파 의사 출신 알라위가 

40년 독재를 하고 있어서

한국과는 미수교국이고 북한하고는 친하다.

그래서 3차 중동 전쟁에서

북한군이 이집트 시리아 쪽으로 참전한다.

전투기 조정사 30명, 탱크병 200명,

대공 미사일 병 300명.

북한은 시리아 쪽과는 혈맹이다.


시리아 총리가 이스라엘 스파이라서 

이스라엘과의 전투에서

번번이 정보 누출로 고전을 면치 못한다.

그는 결국 스파이였음이 드러나서 

사형을 당한다.


소수파인 시리아의 알라위가 고전 끝에도

버티는 것은 뒤에 러시아가 있기 때문이다.

시리아는 10년째 내전 중인데 

미국이 쿠르드족을 앞세워 

대리전을 치르게 되면서 해결이 안 나고 

현재는 소강상태이다.




시리아 알라위 대통령





이집트


1882년 영국군은 앵글로-이집트 전쟁을 통하여

이집트 정치에 개입하기 시작하였다.

1888년 콘스탄티노플 협약을 통해

영국은 이집트의 수에즈 운하를

군사 점령하게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후, 승전한 영국은

패전국인 오스만 제국의 이집트 영토를

강제적으로 자국의 식민지로 편입하였다.


제국주의자들이 만든 국경을 다 철패하고

아랍인들끼리 뭉치자는 대의가 인기를 

끌던 시절이 있었다.

1950년대와. 60년대였다.

이 '아랍 민족주의'를 이끌던 지도자가

아랍 민족의 태양으로 불렸던

이집트의 나세르이다.


나세르는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나라가 

유럽에 복종하는 현실에 상처를 받았다.

하류층이란 갈 수 없었던 

상류층 군사 학교에 기회가 왔다.

나세르는

1948년에 아랍이 이스라엘에게 패하자

이집트 왕에게 책임이 있다고 비판하며

장교 클럽과 함께 쿠데타를 일으켜

왕정 폐지에 성공한다.

이것이 '1952년 이집트 혁명'이다.




다음은 영국을 쫓아내는 일이었다.

나세르는 미국에 까이고 

소련에서 무기를 피라미드만큼 받아냈다.

냉전 시대라 미국은 긴장한다.

결국 이집트를 달래야 했고

세계 최대가 될 아스완 댐을 제안한다.

하지만,

그 원조 협정서에는

미군 기지가 이집트 땅에 주둔하고

미국이 이집트 재정을 감독한다는 조항이 

포함되어 있었다.

노예 계약서였던 것이다.

나세르는 원조를 거절한다.


그러나 아스완 댐은 포기할 수 없었다.

건설 자금이 문제였다.

수에즈 운하가 답이었다.

운하는 

년 약 9,000만 달러의 수입이 있었지만 

이집트는 고작 630만 달러 정도만

받을 뿐이었다.


영국과 프랑스가 운영하던

수에즈 운하 주식회사를 국유화한다.

이에 영국과 프랑스는 

이스라엘과 손을 잡고 이집트를 친다.

미국에 통보 없이.

이집트는 맹렬히 맞선다.

화난 미국이 개입한다.

소련은 이집트를 지지한다고 선언한다.

전 중동의 민심이 냉전 시대에

소련으로 가게 생겼다 생각한 

미국의 대통령 아이젠하워는

영국에게 철수를 종용한다.

하지만 이집트 사람들은 미국에게 

고마워하지 않는다.

미국 CIA가 그 바로 전에

이란에서 쿠데타로 모사데그 정권을

전복시킨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쟁에서 승리 못한 이집트가 

서구 국가들을 물리친 결과가 났다.

이로써 나세르는 

전 아랍의 영웅으로 떠오른다.

어부지리로 히어로가 된 것이다.




나세르는 이슬람 민족주의 개념으로

댐을 건설해 전기를 공급했다.

또한 인도의 네루,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

스리랑카의 반다라나이케를 비롯한 

지도자들과 냉전으로 대치하고 있는 두 강대국을 

견제하는 중립국들의 연합을 전개해 나갔다.


나세르는 큰 업적을 이루면서

세계적인 위상을 얻었고

추종자들도 수도 없이 생겨났다.

카리스마 넘쳤고 뛰어난 연설가이기도 했다.

간이 다른 사람보다 달리 좀 큰 나세르는

그 참에 이집트를 넘어 전 아랍을 단결시켜서

발전시키고 서구 열강들에게

휘둘리지 않는 나라를 만들겠다는

대의를 표방한다.

이 '범아랍주의'는 전 아랍국가를 강타했다.

이 영향으로 시리아에서

먼저 쿠데타가 일어나서 왕정을 무너뜨렸고

이집트에게 나라를 의지했다.




그러나 1967년 6월 5일,

이스라엘은 아무런 경고도 없이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를 일제히 공격했다.

첫 24시간 만에 이스라엘은

이집트 공항의 공군기 전체를 파괴시켰다.


그 뒤로 5일 동안은 

UN이 팔레스타인의 나라라고 선을 그었던

영토를 점부 점령했다.

그 영토는 

'점령된 팔레스타인 영토'가 된 것이다.

유대인들은

6일 동안 전쟁을 수행하고

7일째에 안식일에 들어갔으니,

이를 '6일 전쟁'이라 부르게 되었다.

6일 전쟁은 나세르에게 

모욕적인 사건이었고

그로써 그의 경력을 끝장났다.


6일 전쟁의 여파로

100만 명의 팔레스타인 난민이 생기고

그들은 '팔레스타 해방 기구(PLO)'로

흘러들어 갔다.

이로서 팔레스타인들은 본격적으로

이스라엘과의 항쟁에 뛰어들게 된다.




이집트 나세르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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