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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희 Aug 04. 2022

전쟁에 휩싸인  중동의 나라들 3

화가의 심미안과 통찰력으로 본 <핵심 미술 이야기>

화가의 심미안과 통찰력으로 본

<핵심 미술 이야기>






근대부터의 중동 상황 




전쟁에 휩싸인

중동의 나라들 3







사우디아라비아 1/2


사우디아라비아는

'압둘 와하브'라는 아주 엄격한 

이슬람 원리주의자와 

사우드 부족장이 세운 나라이다.

종교는 

와하비즘을 신봉하는 그의 제자들이

그리고 정치권력은 

사우드 가문이 가지는 것으로 하고

서로 동맹을 맺었다.


사우드 가문의 부족장 

아지즈 이븐 사우드는

1924년 메카를 비롯해

아라비아 반도 80%를 점령하고

1932년 사우디아라비아를 선포한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사우디에서 석유 매장량만 확인되고

채굴도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미국과 영국은 서로 탐낸다.

1944년 미국 루즈벨트는 선을 긋는다.

이란 석유는 영국 꺼.

이라크와 쿠웨이트는 나눠 갖고

사우디 석유는 미국 꺼.

제2차 세계대전 중인 영국은 

미국의 결정에 끽소리 못한다.

세계 패권은 영국에서 미국으로

확실히 넘어가는 순간이었다.

세계 최고의 보유량만으로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이 

이븐 사우드 국왕을 만나서 

예의 바르게 성의를 보이며

사우디 미래 석유를 선점한다.

이것은

약탈이 침공이나 위협이나 사기가 아닌

모범적인 정식 국제 계약의 선례라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하겠다.

모범을 보인 것이다.

그로써, 미국은 석유 획득과 미국 달러의 

기축통화를 이룰 수 있게 되었고

사우디 왕권은 

미국의 보호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루즈벨트는 이븐 사우드를 만나고 

두 달 후에 운명을 달리한다.

죽음을 앞두고 미래의 국익과 질서를 위해

최선을 다한 것이다.




압둘 아지즈 이븐 사우드




프랭클린 루즈벨트 





이슬람 형제단 망명 > 무자헤딘 파견 

> 알 카에다 > 9.11 사태 > 아프간 침공


이집트 나세르는 무슬림 형제단을 탄압했다.

혁명성 강한 나세르와 갈등을 겪고 있는

사우디의 파이살 국왕은 

이집트 운동가들을 받아준다.

'세속주의 권력으로부터 박해받는 

경건한 무슬림을 구원하는

이슬람 왕정국가'라는 면모를 

아랍 세계에 과시하고 싶었던 것이다.


무슬림 형제단 출신 망명자들은

사우디 제다의 왕립대학에서 강의한다.

소련의 아프간 침공이 발생하자

교수와 학생들은 전장에 

무자헤딘으로 참전한다.

무자헤딘의 자금은 사우디,

무기는 미국이 지원한다.

그들이 이기고 돌아왔을 때

찬밥 신세가 된다.

그 골치 아픈 승리자들은 

알 카에다에 들어간다.

게다가 그들은 9.11 테러의 주범이 된다.


미국 입장에서는 

냉전 시대에 소련과의 전장에서 

대신 싸우라고 지원한 우방군이

미국 맨해튼과 국방부를 공격한 것이다.

미국은 알 카에다를 숨기고 있는 

아프간을 서둘러 침공한다.


사우디의 파이살 국왕의 과시욕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사고가 일어났고

크게 번졌다.

이슬람 형제단을 받아들인 것이 발단이었다.

문제는,

이슬람헝제단은 마르크스 영향을 받아

탄생했다는 것이다.

어디에도 마르크스 사상이 들어가면

봉기와 살육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파이살 국왕이 알턱이 없었을 것이다.




메카의 그랜드 모스크 점거 사건(1979년)


사우디는 그동안 

아랍 석유국들의 맹주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세상은 언제나 변하는 것.

1979년 2월 11일 호메이니 혁명이

이란에서 성공한다.

그 영향으로

1979년도 11월 20일에 

주하이만 알오타비의 주도로 

약 500명의 무장 그룹이

사우디 메카의 그랜드 모스크를 

점거한 사건이 있었다.

메카 점거자들은 주장했다.

"돌이킬 수 없이 서구 문명의 유혹에 빠진

타락한 사회를 정화하기 위한

최후의 수단이었다."라고.

점거 세력은 극단주의적 정책을 제안했다. 

왕정은 미국으로 석유 수출을 중단하고

모든 외국인을 추방하고

여성들에 대한 교육 철폐, 

TV의 폐지, 비무슬림들의 추방 등...

무장 점거는 2주 동안 지속됐고

사우디 군의 작전이 실패로 끝나고 말자

프랑스 특공대를 불러 진압작전을 재개했다.

12월 4일, 최루 가스가 뿌려지고

총격전이 다시 벌어졌다.

결국 수백 명이 전투에 휘말려

죽고 난 뒤에야 끝이 났다.

주하이만을 포함한 체포된 67명 중

63명에게 참수형이 선고됐다.


당시 점거에 참가했다가 탈출한 지하드 분자들은

훗날 아프가니스탄 전쟁에도 참전하면서

지하드 운동의 지도자들로 성장했다.




이 사건 이후 권위가 땅에 떨어졌음을 깨달은

사우디 왕조는 권력을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

영화관과 공연장을 없애고,

영화 관람 마저 아예 불법으로 만들어버렸다. 

여성의 운전 금지도 이 사건 이후로 생긴 결과이다.

그 이후 급진주의자들의 보복을 

완화하려는 목적으로

전 세계에 이슬람의 큰 형님으로서

올바른 이슬람을 수호한다는 명목으로

전 세계적으로 돈을 풀게 된다.

그 자금 중 일부가 알 카에다 같은 

테러 단체에 흘러 들어가게도 된다.




걸프전(1990년) > 미군 사우디 주둔


이라크 사담 후세인이 쿠웨이트를 침공한

걸프전이 끝난 후 미국과 사우디는 

이라크의 위협이 남았다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약 5천 명의 미군을 주둔시키기로 합의했다. 

이로써 미국은 중동에서 

패권을 유지하는 가장 확실한 발판을 확보했다. 

사우디는 이라크와 

또 다른 적 이란의 침략을 막기 위해 

미군이 필요했다. 


미국의 중동정책에서 사우디는 

필요 불가결한 존재다. 

아프간 전쟁 때도 사우디의 

프린스 술탄 공군기지를 지휘본부로 삼았다. 

테러와의 전쟁에서 미국이 목표로 삼은 

이라크 공격에도 사우디의 협력이 있었다.


한편, 사우디 국내에서는

이슬람 성지인 사우디아라비아에 

이교도 군대가 장기 주둔하는데 대해 

분노의 목소리가 높았다.




사우디에게 이란의 이슬람 혁명이란?


사우디도 왕국인지라 왕권 위협을 겁낸다.

이란이 시아파인 것도 미운데

혁명을 했다? 

사우디의 국내 걸프만 쪽 시아파 국민이

300만이다.

혁명에 영향받을까 겁난다.


이란의 혁명 수비대 해외 파트의 활약으로

이라크와 시리아 그리고 레바논까지

시아파가 초승달 벨트를 그리며 

사우디를 포위하고

남쪽으로 시아파인 예멘의 후티 반군도 

기승을 부린다.

사우디는 이제 미국도 믿지 못하게 되었고

자국의 방어를 위해 무기가

절실하게 필요하게 되었다.


사실 이란은 인구가 8,400만이다. 

국민들도 똑똑하고 빠릿빠릿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미사일을 잘 갖추고 있다.

사우디 유전에 미사일 한 방이면

사우디는 의외로 단숨에 끝날 수도 있다.

사우디가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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