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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희 Sep 29. 2022

1. 여주 박물관

여주 답사 후기




여주 답사 후기



이번 여주 답사는

조소현 변호사님께서

(사)청사조성환선생기념사업회

이사장이시기에 이루어졌다.

같은 창녕 조 씨를 기념하는 후손이 있다는 것은

명문가이기에 가능하다 하겠다.

물론, 국가보훈처의 지원이 기반이 되어 

부담 없고 풍요로웠다.




여주나 이천은 

이조 백자와

임금님 진상품이었던 쌀로 유명하다.


도자기 중심지는 

고령토 산지여야 가능하다.

도공들은 태토를 찾아 산지로 들어간다.


맛있는 쌀은 

토양이 좋아야 나오는데

그 역할은 남한강이 

퇴적물을 품은 흙과 물을 

공급해주기에 가능하다.


여기까지는 

누구나 추론할 수 있는 사실이다.

이번 답사에서 여주시 학예연구사의 해설은 

새로운 사실을 전해준다.

끝에 '주'자가 붙은 지명은 

거래가 활성화되었던 곳이었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그렇다.

진주, 광주, 전주, 나주, 성주, 상주...

경기도에서는 

여주가 그러한 곳이었다는 것이고

남한강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한다.




남한강은 충청북도 속리산과 

강원도 정선이 발원지이다.

정선 동강 쪽에 지명 유래와 

고인돌 답사를 한참 다닐 때

정선에서 뗏목을 띄워 마포까지

오던 뗏목꾼들의 전해 내려오는 얘기를

정선 아리랑과 같이 들은 바 있긴 하나,

해설자의 얘기로는

물자뿐만 아니라 세금까지 

남한강을 통해 유통되었다 한다.


그러고 보니, 지리적으로 

서해안에서 영남지방과 충청북도 내륙 사이에

남한강이라는 물길이 있다.

그 물길을 따라 서해안의 해산물이

산간 지방까지 유통될 수 있었고

산골 임산물이 한양까지 

빠르게 전해질 수 있었다.

여주 지역에 흐르는 강 이름이

따로 있었으니 '여강'이라 한다.

여유 있게 흐르지만, 

그래서 지은 명칭은 아니다.

교통로의 주축 지역이 여주였기에

여주에 있는 강이라 해서 '여강'이다.


물길이 육로보다 빨랐던 시대이니

나루터가 중요 거점이었다.

여주에 많은 나루터가 있었음을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어 알 수 있었다.

그중 이포 나루가 가장 붐볐다 한다.

이포에는 상인들과 물류업자들이 성행하였다.




여주 지역의 나루 18곳




경제가 형성되는 거점에 

명문가도 이주해 왔다.


창녕 조 씨 문중도 그에 속한다.

그것이 이번 답사 코스에 들리는 

조 씨 한옥이 있는 이유이다.

민 씨와 김 씨에서는 왕비들을 

많이 배출했다.

고려시대 3명, 조선 왕비 8명.

여주는 왕비들의 고장이었던 것이다.









1. 여주 박물관



선사 시대

선사 시대는 구석기, 신석기, 청동기로 나뉜다.

선사 유적지는 한탄강의 경우와 같이

생존을 위해 수렵 채집이 가능하기에

주로 강가에 있다.

여주는 그에 합당한 지역이다.

약 6만 5천 년 전의 유적지부터

발굴되어 있었다.



삼국 시대

여주는

온조왕부터 백제의 땅이었고 

고구려 장수왕 때 고구려로 넘어가고

신라 진흥왕 때 신라 땅이 되니,

삼국의 경계 지역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




백자 하면, 

고려청자에서 분청자기를 거쳐 

이조 백자로 이어지는 것으로 안다.

그러나 그 경로 외에 

여주에는 고려 시대에 이미 

백자가 있었음을 알려준다.

우리에게는 귀중한 전시가 아닐 수 없다.






이 동종이 작다고 하찮게 여기면

오산이다.

큰 종이 갖추어야 하는 모든 것을 

지니고 있다.

종 옆구리에 비천상이나

종을 거는 역할을 하는 

종 머리의 용 형상도 있다.

제작자의 입장에서는 

큰 작품이나 작은 작품이나 

과정은 마찬가지이다.




또한 여주는

고려 후기 대문호 이규보를 배출하였으며,

성리학자 이곡, 이색 등과 관련된 유적을 가지고 있다.




조선 시대



고려시대에 청자가 있었다면

조선 시대 명품 중에 최고품은 

이조 백자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유교에서 성리학 그리고 주자학으로

빠져들어 버린 조선 시대는

흑백 논리를 고집했고 

실생활에서 강요까지 했다.



백자가 

청자와 관련 없이 나온 것은 아니다.

백색이 더 사치스러운데

청자색은 사치로 여겼다.

청자의 비췻빛을 빼다 보니

백색으로 보였지만

대부분 온전한 백색은 아니다.

푸른빛을 머금고 있는 것이다.

유심히 보다 보면 

그 없는 듯 있는 

옅은 푸른 기운에  사로잡힌다.

그래서 백자라 불리지만 맑다.


여주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백자는

얇디얇은 두께로 보아 최고품으로 

궁궐이나 사대부 납품용이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윤승길 초상, 1613년,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71호



조선 시대 회화사에서 

그 빛을 발한 분야 중 하나가 초상화이다.

관료 사회이기에 

사대부들 초상의 수량이 많기도 하지만

질적으로 중국과 일본에 비해 우수하다.

요새로 치자면 

하이퍼 리얼리즘이라 할 수 있는 장르인데

고려 불화의 전통을 이어받아 품격이 높다.


기법 면에서

인물 피부의 자연스러운 생동감을 위해

한지 뒷면에 기초 채색을 하는

'배채법'이라는 우리만의 기법을 

창안해 사용한 것이 특징이라 하겠다.




여주 지자체의 시도

지자체 시행 이후에 

여주시도 여주의 특화 사업에 

많은 투자를 하고 있다.

도자기 특화 사업 단지에

도자문화센터와

전통 가마와 전통 장독대가 

설치되어 있고

공예창작지원센터를 조성하고 있었다.

꾸준히 하면 그 빛을 보게 될 것이다.

한국인은 이미 

도자기에 특화된 디엔에이 종족이니까.












여주의 맛

임금님 진상품이었다는 

여주 쌀로 지은 돌솥밥을 맛볼 수 있었다.

시각적으로 윤기가 좌르르 돌고

식감에서 이천 쌀보다 단단함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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