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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희 Jan 20. 2023

쿠웨이트

화가의 심미안과 통찰력으로 본 <핵심 미술 이야기>

화가의 심미안과 통찰력으로 본

<핵심 미술 이야기>




쿠웨이트


쿠웨이트의 역사는

사람이 살기에는 너무나 열악한 곳이라 

별 의미가 없다,

과거 쿠웨이트 땅은 페르시아 제국의 영토였다.

쿠웨이트 지역을 가장 오래 지배했던 국가는

페르시아 제국, 지금의 이란이다.


현재의 쿠웨이트인들은

고대 로마 제국 시절부터 향신료 등을 거래하며

동서교역에 종사하던 시리아와 

사우디의 아랍인들인 아니자족이 기원이다.

이들은 17세기 이후에 포르투갈 무역 세력에 밀려

쿠웨이트 지역으로 이주하거나

사우디 북부의 아니자족은 

와하비 세력과 문제가 있어서

쿠웨이트 지역으로 이주하게 된다.

이것이 위쪽의 이라크인들과는

문화도 관습도 많이 다른 이유이다.


18세기 중반, 영국이 동인도 회사를 경영하면서

유럽-중동-인도 간에 교역량이 크게 늘었다.

그래서 18세기 쿠웨이트는

중동의 교역 중심지로 변화하였다.

사막인 쿠웨이트에 뭐 털어먹을 게 없었는지라

영국 동인도회사도 나쁜 짓 안 하고

순수하게 교역만 했다.


천연 진주 생산국이었던 쿠웨이트는

20세기 초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보호해 달라며

자발적으로 영국 보호령이 되었다.

쿠웨이트가 완전히 독립한 것은 1961년이다.






1934년

본격적인 석유탐사를 위한 권리가

British Petroleum과 Gulf Oil의 컨소시엄에 주어진다.



1937년 

쿠웨이트에서 석유가 발견된다.


미국의 지질학자들이

인류 역사상 최고의 상품이 될 것이다라고 한다.

중동의 석유는 이미 영국이 장악하고 있었다.

선발 주자였던 영국을 미국이 어떻게 제꼈을까?

프랭클린 D. 루주벨트가 교통정리를 하게 된다. 



1944년

주미 영국 대사 헬리팩스가 루즈벨트를 접견한

그 자리에서 루즈벨트 대통령이 말한다.


"이란 석유는 영국이 갖고

이라크와 쿠웨이트의 석유는 공유하고

사우디의 석유는 미국이 갖는다."



국가별 원유 매장량




국가별 원유 채굴과 수출량




위의 그래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석유 매장량이나 수출량에서

사우디가 단연 큰 차이를 보이는 1위이다.

이것은 석유가 필요로 할 때 뽑을 수 있는 나라는

사우디뿐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1960년 전까지 석유 가격을 좌지우지했던 것은

미국과 영국의 7개 석유 회사들이었다.

아랍 입장에선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한다.



1960년 

OPEC 탄생


석유 매장량이 많은 5개국,

사우디, 이라크, 이란, 쿠웨이트, 베네수엘라가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에서 모임을 갖는다.

이들은

국제 석유 가격에 대한 발언권을 강화하기 위해

조직을 만든다.

그게 바로 OPEC(석유수출기구)이다.

OPEC 5개국의 석유 생산량은 

전 세계 생산량의 86.6%를 차지했다.


이집트의 사다트는

제3차 중동전쟁으로 이스라엘에 빼앗겼던

이집트의 시나이 반도와

시리아의 골란 고원을 되찾기 위해

이스라엘과 전쟁을 준비한다.

그것이 제4차 중동 전쟁이다.


1973년 제4차 중동 전쟁 직전에

이집트 대통령이 사우디를 방문해

석유 길 봉쇄를 부탁한다.

OPEC는 석유 생산량을 줄인다.

이스라엘 편을 드는 미국과 네덜란드 등의 국가들에게

석유 수출 금지를 한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철수할 때까지 

석유 생산을 매달 5%씩 줄이겠다고 한다.

아랍 산유국들은

석유를 정치적 무기로 사용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일어난 사건이 석유 파동이다.



1973년

제4차 중동 전쟁과 같이 일어난

제1차 석유 파동은 전 세계에 충격을 준다.


단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상황이 된 것이다.

석유 생산을 줄이니까 유가가 치솟는다.

당시 70%까지 유가는 급등한다.

전쟁 전 국내 1배럴당 2만 원이던 유가가 

2달 후 유가는 8만 원이 된다.

중소기업의 2/3가 도산한다.

한국에서도 IMF 전 최악의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 와중에 미국은 사우디와 비밀 협약을 맺는다.

석유는 앞으로 달러로만 거래한다.

이렇게 해서 달러가 세계 기축 통화가 된다.



1979년

이란에서 이슬람 혁명이 발발한다.


이란과 사우디는 친미 양대 기둥이었다.

이란은 반미로 돌아선다.

아랍의 왕정 국가들은

이러한 혁명에 위협을 느낀다.

이란과 국경을 맞대고 있던 이라크에서는

사담 후세인이 대통령으로 취임한다.

군대를 안 갔다 온 후세인은

군복을 입고 훈장을 많이 달고

총을 들고 공포탄을 날린다.

강한 남성성이 통하는 중동이다.

국민을 통치하는 강력한 방법은 먹힌다.

이라크 국민들은 그를 존경하고 두려워하게 된다.


'사담'이란 뜻은 '저항하는 자'라는 뜻이다.

예부터 사람 이름이 중요한 것은

사람들의 운명은

이름대로 되어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많이 하는 생각대로 삶은 되어간다고나 할까?

사담 후세인은 저항을 많이 했지만,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저항하는 꼴은 못 보는

잔인한 스타일이었다.

그의 독재에 많은 사람들이 희생된다.

그는 국민들에게는 그에 대한 숭배를 요구한다.

미국에서는 그를 히틀러에 비유했다.

미국 대통령 아버지 부시는 

사담 후세인을 '환생한 히틀러'라고 했다.




잔인한 사담 후세인의 최대 골칫거리는

이란과의 경계를 이루는 강의 영토 분쟁이었다.

그 강은 석유를 실은 배가 나가는 지역이었다.

그리고 이란의 이슬람 혁명이

자국에 넘어오는 것을 걱정한다.


이란은 대다수가 시아파이다.

이라크는 20%의 수니파와 20%의 쿠르드

그리고 60%는 시아파이다.

정권을 잡고 있는 사담 후세인 쪽은 

소수 20%의 수니파이다.

시아파 이란의 혁명군이 바로 옆에서 활동은 하고

60%의 시아파 자국민이 흔들릴까 봐

늘 걱정이 아닐 수 없다. 



1980년 

이라크 사담 후세인이 이란을 침공한다.


당시 이라크의 군대는 중동 최강이었기에

후세인은 이 전쟁이 금방 끝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무려 8년을 전쟁한다.

당시 이라크를 도운 나라는

후세인을 악마 취급했던 미국이었다.

미국은 왜 이라크를 도왔을까?

이란이 반미로 돌아섰기 때문이다.

서구에서 받은 화학무기도 이란에게 사용했다.

100만 명의 사람이 죽어갔다.

그리고 가장 의아한 건

이란에도 무기를 판 것이 미국이었다.

왜 그랬을까?

어떤 나라도 강해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양쪽 나라에 싸움에 부채질하며

승자도 패자도 없이 소진을 시켰다.

많이 악랄한 짓이다.

그것이 지구 역사의 민낯인 것이다.


8년간의 전쟁은 이라크를 파산으로 몰고 갔다.

그 경제적 손실이 173조 원.

부채가 34조 원.

그동안 석유 팔아 쌓아 놓은 돈도 모두 탕진하니까,

또 한 번의 무리한 도박을 선택한다.

파탄난 경제를 살리기 위해 찾은 해결책은

또 다른 전쟁이었다.

그가 지목한 희생양은 쿠웨이트였다.



1988년 

이라크 자국민 쿠르드족에게 화학무기를 사용한다.


쿠르드족은 

튀르키예, 시리아, 이라크, 이란이

만나는 지역에 살고 있는

인구 약 4,000만 명 정도 되는 민족이다.

영국이 나라로 만들어주기로 했지만

이라크 북쪽에 유전이 발견되며 무산된

비운의 민족이다.








전쟁이 끝나고 비쌌던 석유 값이 폭락한다.

이라크는 돈이 필요하다.

이라크의 큰 유전 중 하나인 '루마일라 유전'이

쿠웨이트와 국경에 있다.

80% ~ 90%는 이라크에

10% ~ 20%는 쿠웨이트에 있는 유전이다.

이라크는 전쟁 중에 채굴을 못했지만,

쿠웨이트는 채굴을 많이 했다.

후세인은 화가 났다.

전쟁 비용을 지원한 아랍 국가들,

무상이 아니라 차관이었다.

후세인은 탕감을 요구하지만

탕감해 줄 나라는 없다.

후세인은 쿠웨이트에게 말한다.

전쟁 중에 '루마일라 유전'서 채굴한 거 다 내놓고

빌린 15조 원 없었던 일로 한다.

게다가 페르시아만 국경에 있는 두 개의 섬을 달라.

쿠웨이트는 원래 이라크 영토였는데

영국이 선을 그어 빼간 거다.

쿠웨이트는 요구를 들어줄 리 없다.





루마일라 유전




1990년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한다.


제네바 유엔 사무소에서 회의를 한다.

미국이 가장 우려했던 것은

미국이 형성했던 연합군의 분열이었다. 

그런데, 후세인은 고맙게도 끝까지 거부한다.

유엔은 이라크에 최후통첩을 한다.




1991년

제1차 걸프전이 발발한다.


후세인은 베트남 전의 악몽으로

미국이 전쟁을 치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미국은 미국 전쟁사의 치욕을 만회하고자 했다.


미국과 유엔의 다국적 연합군 39개국이 참전하는데

직접 전투 참가국은 28개국 60만 명이었다.

이 규모는 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큰 규모였다.

이렇게 많은 참가한 이유?

세계의 나라들은 73년 1차 오일 쇼크의 악몽을

다시 꾸고 싶지 않았다.


연합군이 걱정했던 것이 있었다.

화학 무기.

미국은 말한다.

너네, 화학 무기 쓰지 마라. 우리는 핵이 있다.

그리고 최후통첩을 한다.

후세인은 콧방귀도 안 뀐다.




1991. 1. 17

제1차 걸프전이 시작된다.


이 전쟁의 미국의 작전명은 

사막의 폭풍 Desert Storm이다.

미국은 폭풍보다 더 어마어마하게 

바그다드 공습부터 한다.

특수 페인트 칠로 레이더에 잡히지 않는

하이테크 무기인 스텔스 공격기와

토마호크 미사일 등 신무기들이 등장한다.

24시간 뉴스 채널 CNN이 실시간으로 송출한다.


스텔스는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의 

주요 시설들을 정밀 타격한다.

토마호크는 정확도가 높은 순앙 유도탄이다.

베트남전 당시 개발되어 걸프전에서 최초 사용한다.

아메리카 인디언 도끼의 이름을 차용한 토마호크는 

이라크의 방공망을 무력화시켰기에

가장 위협적인 하이테크의 결정체였다.

이로써 미국의 위용은 과시되었다.


새로운 전쟁의 양상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걸프전이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다.

하이테크 무기의 출현도 그렇지만,

특이한 일은

미디어와 손잡고 전쟁을 방송했다는 사실이다.

왜 미국은 전쟁을 생중계했을까?

베트남 전쟁의 트라우마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로써,

미국은 베트남 전쟁의 패전국 이미지를 벗고

강대국 이미지를 확실히 만들었다.


100만 병력을 자랑하던 이라크군은

거의 힘을 쓰지 못한다.

이라크는 공습에 대항해서 

쿠웨이트 유전에 불을 지른다.

아랍 전체의 전쟁으로 끌고 가려고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서 철수하면 

쿠웨이트에서 철수하겠다고 한다.

사담 후세인은 이스라엘에 스커드 미사일을 쏜다.

대부분 패트리어트 방어로 격추되었으나 

일부가 이스라엘에 떨어졌다.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이 전개된다.

이스라엘이 보복하면 3차 대전급으로 가는데

이스라엘은 보복을 하지 않았다. 

이에 미국은 이스라엘에 고마워한다.

다국적군은 쿠웨이트에 지상군을 투입한다.

계획대로 4일 만에 쿠웨이트를 접수 완료한다.













세계 최초의 스텔스 공격기, F-117A 나이트호크




토마호크 지상 공격 미사일

Tomahawk Land Attack missile, TLAM





1991년 2월 28일

사담 후세인이 항복한다.


이라크군은 철수하기로 한다.

사담 후세인이 철수하면서 화가 나서

쿠웨이트 유전 700개 중에 600개에 불을 지른다.

유정 화재 진압에 수개월이 소요된다.

쿠웨이트는 지금까지도

그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미국의 아버지 부시는 그보다 더한 일을 저지른다.

고속도로로 퇴각하는 이라크군에게

밤에 폭격기를 출격시켜 

고속도로에 무차별 융단폭격을 가해 전멸을 시킨다.

걸프전에서 벌어진 가장 끔찍한 짓을 한 것이다.

이름하여 '죽음의 고속도로'이다.

이라크군 20만 명이 몰살된다.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보다 더한 빠른 학살이었다.

이라크는 미군이 고속도로에 30분간 가한 폭격으로

이란과 치렀던 8년간의 전쟁보다 더 큰 피해를 입는다.

이에 비해 이 전쟁의 미군의 사상자는 150명이었다.


이 일로 미국은 서구 나라들에게도 비난을 받는다.

게임에서 반칙을 심하게 한 팀은

정당한 승자라 할 수 없다.

사담 후세인 제거 명분이 없어졌다.

아버지 부시 대통령은 전쟁 중단을 선언한다.

부시 부자는 딥스테이트 앞잡이였다는 루머가 있다.


사담 후세인은 바그다드로 돌아가서

이라크 국민에게 

우리가 이긴 전쟁이다!라고 한다.

우리를 못 이기고 연합군이 물러갔다.


유엔은 이라크에 금수조치를 내린다.

사담 후세인을 향한 조치이지만

피해는 이라크 국민들 차지가 된다.

금수조치 이후 10년 넘게 기아에 허덕이고

더 이상 잃을 게 없는 나라가 되어 간다.

그럼에도 사담 후세인의 편집증은

치료될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죽음의 고속도로




이 전쟁 결과를 지켜본 중국은

더 이상 물량전이 힘을 못쓴다는 것을 알았고

군사 현대화를 선언했으며

재래식 무기만 대량 보유한 북한 또한

장거리 미사일과 핵무기에 더욱 치중하게 된다.





황금의 샘?


동화에서나 나올 법한  

황금의 샘의 이야기가 현실에서 벌어졌다.


이라크와 쿠웨이트가 전쟁으로 치닫은 원인은

악이 스며들어서 욕심이 생겨서 이고

모든 것은 석유 이권과 결부되어 있다.


현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양면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석유의 다른 이름은 돈이다.

돈은 안정감을 주기도 하지만

돈 욕심은 싸움을 부른다.


동화 같은 현실,

검은 노다지는 욕심에 의해 눈물이 되고

눈물은 말라야 진주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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