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의 심미안과 통찰력으로 본<핵심 미술 이야기>
화가의 심미안과 통찰력으로 본
<핵심 미술 이야기>
몇년 전 홀로 답사했던 곳이 있습니다.
힐링에 도움이 되는 곳이기에
추리고 수정해서 소개해 봅니다.
북동쪽으로 별서를 감아 도는
숲길을 택했다.
사람 손이 좀 많이 탄 원림이다.
숲길을 길가로 아름다운 나무가 계속되고
그 밑으로는 별서를 둘러치고 있는
대나무 숲이다.
사람이 식재한 숲일지라도
시간이 오래 지나게 놔두면
자연이 시간을 갖고 숨을 불어넣어
자연에 근접해지며 그 또한 아름답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도
행복하게 해 줄 만큼...
이렇게 풍부한 만족감을 주는 숲길은
참 오랜만이다.
내가 자연 속에 있구나 하는 느낌?
아니 자연이 내 몸안으로
스며들어 온다는 표현이 더 적당하리라.
초입에서 내려오면서는 숨이 막혔지만
중간부터의 숲길은 숨이 아예 멎는다.
어떻게 숨을 안 쉬고 내려왔는지 모르는
미궁의 세계이다.
내려가 바닥을 칠라 치면
다시 살짝 굽이쳐 오른다.
그리고는 좁은 대나무 숲길 정점에
밝게 뚫린 통로가 보이고
그 너머로 쓸쓸한 저수지가 놓여있다.
넋 놓고 곧바로 가면
저수지에 빠져 물귀신이 된다.
지금까지 별서 원림을
반 바퀴 오른쪽으로 돌아 내려왔다.
나머지 반을 왼쪽으로 돌아 올라가
밖을 다 둘러보고 안으로 들어갈 것인가?
이쯤에서 안으로 들어갈 것인가?
원림(園林)의 개념
백운동 별서를 조감해 보자면,
둥그런 원림의 가운데에 계류가 있고
계류 오른쪽으로 널찍한 공간에
별서가 조성되어 있다.
지금까지는 위쪽 주차장에서
안으로 계곡을 따라 내려와
별서 오른쪽 숲길을 돌아
별서 남쪽 끝까지 왔다.
숲에 취해서 판단이 좀 늦었다.
이번에는 밖으로 마저 돌까 하다가
별서 남쪽에서 가운데로 치고 올라가
별서 남쪽 샛문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이쯤 해서 별서로 들기 전에
원림(園林)의 용어 정리를 해본다.
원림의 원(園)은 둘러친 담 안에
조경하는 것을 말한다.
림(林)은 숲이다.
자연 그대로의 숲은 원시림,
자연림, 처녀림이라고도 부른다.
그러니까 원림은
담장 안과 밖을 아우르는 개념이다.
조선에서는
정원(庭園)이라는 용어를 사용 안 했고
원림이라는 용어를 써왔다.
이로써 숲과 삶의 어우러짐을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반면에 일본의 정원이라는 말은
범위가 집안에 국한된 뜰이라는 개념이고
엄밀히 얘기하자면 디자인이다.
대학 선배 중에 ㅇㅇ대 조경학과
교수하는 이가 있다.
평창 동계올림픽 전에
4만 5천 평의 평창의 어떤 부지의
개발 프로젝트가 있었을 때,
색채 전문가로 회의에 참석해
그 선배를 만난 적이 있다.
그를 소개한 다른 동문이 귀띔하기를
그는 말기 암 선고를 받고
지리산에 들어가서 완치되어 나왔고
순천만 국제정원박람회 총괄을 맡아
진행하고 있다고 했다.
이 조경학자는 죽음을 이겨낸 사람답게
조용하고 차분했다.
그리고 자신의 조경론을
다음과 같이 진지하게 말했다.
“중국의 유명하다는 호수가 하나같이
바다처럼 넓잖아요.
정원도 태산(泰山)을 옮겨놓은 식이고요.
우악스럽지요.”
최근 들어 동양 정원의 대표국으로
떠오른 일본에 대해선
인위적이라고 단정했다.
“그들은 조경 대신
조원(造園)이라는 용어를 사용합니다.
이어령 선생이 말했듯
‘축소지향’이랄까….”
한국은 어떨까. ‘순수’라고 했다.
"손을 안 댄 것처럼
자연과 하나가 되는 것,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세계지요.
거대한 중국 정원, 정교한 일본 정원은
처음엔 인상적이지만 볼수록 질립니다.
반면 한국 정원은
시간이 갈수록 다시 보고 싶은,
음식으로 치면 ‘진국’ 같기도 하고
정갈한 채소처럼
정신을 풍요롭게 만들어 주지요."
숲 동굴 같은 어두운 길을 따라 올라갔다.
옆의 계천은 주위의 나무로
뒤덮여 있어서 더 컴컴했다.
남쪽 개천가의 숲인데,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고
사람이 손을 안 댄 곳이다.
사람 손 안 타기가 더 쉽지 않은 일이지.
인간은 통상
자연을 그냥 내버려두질 못 한다.
그러고 보니 백운동 원림서
자연림은 이 부분 한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