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의 심미안과 통찰력으로 본 <핵심 미술 이야기>
화가의 심미안과 통찰력으로 본
<핵심 미술 이야기>
백운동 별서 정원은
월출산의 남쪽 가운데로 흘러내리는
능선 밑쪽에 위치해 있었다.
그 능선 바로 동쪽에
강릉 경포대와 이름이 같은
금릉 경포대 계곡이 위치해 있다.
별서 정원을 충분히 돌아보고
다시 주차장으로 올라와 조금만 가면
경포대 계곡 입구가 나온다.
월출산 등산객들을 감당해야 하기에
주차장이 꽤 크다.
주차장에 위에 숲과 계곡이 보이는 쪽으로
발코니를 갖춘 한식당이 있는데,
토속적인 맛을 푸짐하게 제공한다.
더불어 가성비까지 좋은 것이
특히나 마음에 든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했다.
백운동 별서를 돌아보고 난 후
바로 산에서 교신이 오고 있다.
월출산 남쪽에 옷깃을 여민 것 같은
모양새를 하고 있는 계곡이
월출산 국립공원 경포대 지역이다.
그 안에 뭐를 숨기고 있길래 저리도 조이고 있을까?
젊어서 같으면 서둘러 정상에 올랐을 것이다만
이제 그런 기력도 기력이거니와 요령만 늘어,
나도 쉽사리 거동하지 않는다.
그간의 바위 탐사로 바위의 패턴을 읽고 있는지라
대충 어떠한 바위들이 어떻게 구성하고 있는지가
머릿속에 그려진다.
산 안에 들기 전에 입구에 서성이며
괜한 헛기침하며 동정을 살피고 있었다.
산 주인과의 소통이 우선 되어야 한다.
주인이 허락지 않으면
그냥 돌아갈 태세도 비쳐 보였다.
그러나 바위는 그렇다 치고
계곡이 궁금하지도 않냐는 메아리가
내 속에서 울리고 있다.
뭐 계곡이라면 양식이 아직 덜 잡혀
답사를 더 하긴 해야 하지.
슬슬 얼쩡거리듯,
마지못한 듯 발걸음을 산으로 옮겼다.
국립공원 표지판은 잘 되어 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표지판을 보고
방향을 확인하고 계속 간다.
일반적인 산행이 우리는 아니다.
산에 채널을 맞추었으면
지속적으로 그 흐름을 타 주어야 한다.
그럴 경우, 산은 자신의 것을 다 보여준다.
비밀까지도.
그 표지판을 세운 사람들 입장이 보이기 시작했다.
왜 이 지점에서 방향을 제시해 주고자 했냐는 것.
길도 없지만 표지판 뒤쪽으로는 계곡이다.
표지판 세우는 담당자는
계곡을 잘 알고 있었을 터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계곡에서 난장을 피우는 것을 경계해,
아예 못 들어오게 표지판을 그쪽에 세워 막고
다른 곳으로 길을 유도한 듯하다.
나는 계곡을 음미하는 사람이지,
더럽히는 사람이 아니다.
계곡으로 들어가 봤다. 멋진 장소다.
좀 더 올라가게 된다. 더 멋지다.
떡두꺼비 같은 자태를 갖춘,
현대 유명 조각물 보다 훌륭한 큰 바위도 보인다.
자그마한 폭포도 있고 구곡(九曲)은 아니더라도
작은 둥근 웅덩이의 물고임도 적절한 위치에 있다.
그 웅덩이의 물길을 따라 올라가니
계곡의 주요 바위가 되는 듯한 자태를 한,
세 덩어리의 큰 바위를 만났다.
그 바위를 병풍으로 삼아 보아하니
그 일대가 아주 범상치 않은 듯한 장소로 보여진다.
한참을 즐기고 있으려니
이번에는 내 생각이 맞았다는 것을
산이 다음과 같이 확신시켜 준다.
세 덩이의 큰 바위 중 한 바위 꼭지에
뭔 글이 적혀있는 것이 보인다.
'성균 박사 청원 이금'이라고 쓰여 있다.
성균박사? 고려 때 성균감이면 정 7품이고
조선 때 성균관이면 정 8품의 벼슬이다.
"성균박사로 있는
맑은 근본이라는 뜻의 청원이라는 호를 가진
이금이라는 사람이 왔다 가다."라는 문장이다.
한양의 벼슬아치가
이 계곡에 피서를 왔다 갔다는 표식이다.
옛 선비의 그윽한 피서지를 발견한 셈이다.
산에 들자마자 산과 교신한 보람이 빨리도 왔다.
나도 선비마냥 한동안 그윽한 분위기에서
맑은 물이나 즐기다 가련다.
약간의 신비스러움이 현실에 투영되어질 때가
삶에서 신과 같이 호흡하고 있다는 안도감을 주고
재미 또한 있다.
이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다양한 의식을
골고루 사용할 때 얻어지는 보너스와도 같은 것이다.
현재의식에 또렷이 있되
초의식이나 잠재의식이
들어올 자리를 마련해 줌으로써
인간이면 누구나가 가능한 일이다.
흐르는 물은 맑다.
보기에 맑은 물은
정신도 씻겨 준다.
소리까지도 신선하구나!
새들도 그렇다 한다.
물 위에 비친
저 아련한 연둣빛
사라질까 걱정이다.
계곡에서 나올 때쯤
떡두꺼비 바위의 뒤태를 다시 보고
아연실색해버렸다.
시카고 밀레니엄 파크
인도계 영국 조각가 '아니쉬 카푸어'의
'클라우드 게이트'라는 작품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저 바위 앞에서는
역사 이래 지금까지의
모든 조각가들은 다 명함을 내밀어서는 안 된다.
모든 예술가들이 한순간에 몰살되어 버린다.
도대체 내가 뭐 하고 있는 거야 하는 절망도 밀려온다.
단순하되 무궁한 변화가 있다.
각도마다 다 시사하는 바가 다르다.
납작한 듯하면서도 언제 날아오를지 가늠할 수 없다.
도대체 어느 정도 예술적 감각이 동원되어야
저렇게 자연스러울 수 있을지 의아하다.
아니 모르는 것이 답일지도 모른다.
자기는 그냥 계곡에 있는 바위라지만
왜, 어떻게, 어떤 경로로 그리 있어야 하는 줄 모른다.
산 위에서는 문장대처럼
산을 지그시 누르는듯하면 폼이라도 나겠지만
여기는 계곡이다.
공현진 바닷가의 저보다 더 떡시루 같은
단순한 바위를 마주치고 느꼈던 바와도 비슷하다.
근데 여기는 계곡이다.
밑이 꺾여져 파졌다는 것이 주는 절대 예술감?
이 정도 되면,
역사 이전보다 훨씬 이전에 우리가 상상도 못 할
선인류의 존재와 그들이 손을 댄 것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아니 못하겠다.
현 일류가 부당하기까지 하다.
바위라는 질감의 속성은
물에 의해 쓸려 다듬어진다는 생각?
사암이나 가능한 얘기다.
강한 화강암인 경우는
어느 세월에... 그것이 가능하기나 한 얘기인가?
교과서적인 지리학자들 말 다 소용없다.
이 바위는 석회암이 아니다.
불가사의한 바위가 저리도 있다.
아니쉬 카푸어, 클라우드 게이트,
시카고 밀레니엄 파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