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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희 Apr 27. 2023

강진
사의재 5, 6, 8

화가의 심미안과 통찰력으로 본  <핵심 미술 이야기>

화가의 심미안과 통찰력으로 본

<핵심 미술 이야기>




강진

사의재 5, 6, 8















선비 문화의 정체성


꽃 감상으로 한결 리프레쉬된 상태에서

유쾌하게 사의재로 들어섰다.


이건 또 뭐야!

사의재 바로 앞마당에 

커다란 흉측한 동상이 두 인물이나 

버젓이 서 있다.

사의재를 보기 전에 

나를 약 올리기로 작정했나?

이유는 조각상 옆구리 밑에 

찾지 않으면 볼 수도 없는 위치에 쓰여 있었다.

다산 선생이 강진에 유배 와서 

초기에 이곳에 머물면서

같은 울타리 안 주막 있던 주모와 딸이 

다산을 지극한 보살핀 것을 기념한다는 것이다.


이 위치라면 다산의 동상도 욕 나올 판에 

웬 주모와 딸인지

하도 어안이 벙벙해 화도 안 난다.

결국 그들이 강진인이기에

강진의 자존심을 대변하고자 하는 

의도였다고 본다.

그들의 사고는 타지인들의 수준을 

자신들의 잣대에 맞추고 있다는 것인데

난센스도 이런 난센스가 없고 

착각도 자유지만

몰염치한 '지역 이기주의'의 잔상을 본 것이 

썩 유쾌할 수는 없다.

유명 조각가의 심혈이 들어간 어울리는 작품이면 

더불어 보존할 수도 있겠건만

언젠가는 폐기 처분 해야 될 것이다.


안내판에 쓰인 스토리는 

나름 호응이 가는 일면이 있다.

내용은 다산이 유배와 배고픈 시절

주모가 해준 아욱국을 맛있게 자셔서 

원기를 회복했다이다.

그래서 지금도 군청 관광과 관리하에 

사의재와 같이 있는 주막에서 

아욱국을 판매하니 맛을 보시라?

다산에 결부된 아이템으로 참 좋은 얘기다.

군청서 관리하니 가격도 싸다. 

먹어보니 바지락도 같이 넣어 맛도 좋다.


어차피 이미지 손상된 김에 

조금 리얼하게 따져보자.

지금도 서울 사람이 가면 대우받는 오지인데

그 당시에는 다산 정도가 오면 

그 지역 어느 누구에게도 신적인 존재 아니었겠나.

주막집 아낙네와 딸이 선해서 

특별히 아욱국을 했겠나.

강진인인 아낙네와 딸을 부상시키려는 의도가

거슬린다는 얘기이다.

다산의 입맛에 아욱국을 평소 좋아했다 

정도해도 될 얘기를...

"오버하고 있네."라고 

속에서 투덜거리는 소리가 나온다.

단언컨대 이런 것이 지역 이기주의로 인한 

정신적 문화훼손에 속한다.

게다가 실상은 다산이 그 주모의 딸을 취해

임신까지 시켰다는 얘기는 

표지판에 넣지는 못하면서...

정약용의 딸을 낳게 된 주모의 딸은

'소실 정 씨'로 불렸고.

당시의 양반 상놈의 엄격한 계급 사회에선

그것이 문제가 될 사항은 아니긴 했을 것이다.




사의재 감상하기에

왜 이리 방해되는 것이 많은지 모르겠다.

무시하지 않으면 진도를 나갈 수가 없으니...

정식 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표지판을 

어렵사리 발견했다.

거기에는 사의재의 뜻이 적혀 있었다.

유배 왔지만 선비로서 

거처에 각오를 다지는 현판을 달고

기거를 하고자 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철저한 면모는 

선비문화의 바람직한 정신이 아닐 수 없다.

여기서 그 '선비문화'라는 것은 

유교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유교 이전부터 내려오던 문화를 얘기하고자 함이다.

'선비'라는 말 자체가 공자 이전으로 올라간다.

유교에선 선비에 해당하는 용어는 유생이다.


이런 얘기를 들먹이는 것은

우리 문화의 '우리 것(Originality)'을 

찾아내고자 함이다.

오랜동안 이것저것에 가려져

제대로 된 우리 것이 무엇이었는지 

알아보기도 헷갈리는 형국이니

'정체성(Identity)'을 회복해야 되지 않겠는가.

'선비정신'의 '선비문화'는 

우리가 의식 개혁이 되는 데 있어서

상당히 중요한 정신적 근거로 

작용될 요소라고 생각한다.

전문 용어로 만들어 보면 

'근원 정신문화유산'이 적당하겠다.





옛 초가의 모습, 사의재


왜 사람은 좋은 자기 것을 버리고 

새것을 선호했을까?

순간순간 새로운 것이 진리인지도 모르겠다만

물질 세상에 한해서는 

편리함이 좋은 것으로 비쳐서 일 것이다.

시대 흐름이 바뀌는 상황일 때는 

기준을 잡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휩쓸린다는 것.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이미 다른 세상이다.




전라도에 한옥이 많을 것 같아도

찾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세상이 오고야 말았다.

예상했던 일이긴 하다.

강진읍에 영랑 생가와 

다산 정약용의 유적지인 다산초당과

다산의 유배지인 사의재를 제외하면 

옛집은 없었다.

그것이 나를 서글프게 한다.

희귀한 것은 소중한 것이 졸지에 되어 버린다. 

그렇게 헌신짝 버리듯 버린 것이 어제 이건만 

오늘은 없으니 아쉽다.




다시 지으면 될 것 아니냐고?

옛 맛이 안 난다.

옛날식으로 하면 될 것 아니냐고?

어림없다. 

시대가 바뀌어서 돈 들이고 욕만 먹는다.

기존 것이라도 잘 보수하며 

관리해 쓰는 것이 답이다.




이쯤 되면 어디서 옮겨와 다시 지었든 간에

사의재 같은 평범한 초가 한 채가 

다산 정약용 선생의 기념 장소가 아니라

문화재로 등극해야 할 판이다.

어려서부터 안쓰러웠던 초가에 대한 걱정이 

현실이 되었으니

초가의 문화재 등극도 먼 일이 아니리라 본다.

초가는 버린 사람들이 

김치 없이는 밥을 왜 못 먹겠다는 지 모르겠다.

펑펑한 바지가 활동하기에 편한데

왜 몸에 딱 붙는 쫄쫄이 바지가 

유행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지금 신랄하게 비꼬고 있는 중인 거 맞다.

이렇게라도 한탄을 안 해 속병 나면 

나만 손해다.

그렇다고 누구한테 책임 추궁할 수도, 

할 일도 아니다.

지금이라도

국민 의식을 다시 추스르게 하는 것이 

최선의 현명한 일일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사의재를 접하니 

고향 집을 다시 오게 된 듯 푸근했다.

그리고 살아남아준 초가와 

다산 선생에게 감사한다.

조선 시대에 

일상에서 깨지든 말든 사용하던 백자에 

지금 밥을 담아 먹는 기분이랄까?

지금 아니면 초가를 언제 체험하겠냐는 

지극한 심정으로 사의재에 살금살금 접근했다.





































우리 진리의 상징성, 둥그스러움


사의재의 옛 모습 그대로임에는 

아주 만족스럽다.

사람이 살지 않는 집으로서

그 정도 세월에 

이 정도 보존이 되었다는 것도

참 고마운 일이다.

하지만 예술인의 시각에서 보건대

가장 중요한 요소인 형태에서 

마음에 걸리는 점이 있다.

바로 초가지붕의 실루엣 라인인 것이다.


외형적으로 초가의 아름다움은

초가지붕의 둥근 라인과 풍부한 볼륨에 있다.


그 둥근 볼륨이라는 것은

한국미적으로도 전라도 항아리나

조선 달항아리나 고려청자 및

거슬러 올라가 신라 토기까지 

이어지는 맥을 갖고 있다.

우리 지명에서도 달이라는 명칭은

둥근 산일 경우에는 

어디서나 써왔던 것을 보면

달과 같이 둥근 것은

근원 이미지와 연결되는 중요한 사항이다.


그 둥근 이미지는 진리를 형상화했을 때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표현이었기에

더 고대로 올라갈수록 신성시되기까지 한 것을

여러 전통이나 풍속 그리고 이론에서 나타난다.

손쉽게 이해할 수 있는 예로

옛 할머니들이 장독대에 치성을 드릴 때

둥근 사발에 정화수를 담아,

둥근달을 보며 기도를 드렸고

서낭당에 치성을 드릴 때도

팔로 둥근 원을 그리며 빌었다.


가장 단순한 겨레의 상징인 

아리랑과 태극의 도형이

둥근 원 안에 있는 것도 무시 못한다.

오죽하면 신라 박혁거세나 가야 김수로를

둥근 알에서 나와 건국을 했다고 했겠는가.


알고 보면 이렇듯 중요한 것이 

'풍성한 둥그스러움'이건만

이 시대가 이런 점을 간과(看過)하는 것은

정신적으로나 감성적인 면에서

심각한 문화 손실이 아닐 수 없다.




초가집은 매해 이엉을 잇는 수고를 해야 한다.

기와집과는 다르게 번거로운 부분이라 하겠다.

사의재의 초가 얹은 것은 옛 초가를 걷어내고

새것을 얹었다고 밖에 볼 수 없다.

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는지 모르겠다.

뒷산 뻐꾸기도 다 우는 사연이 있다지만

뼈에 가죽만 붙어 있는 것을 보는 듯 빈약하다.

초가는 옛 것 위에 새것을 차곡차곡 쌓을 때

풍성함이 깃들고 실생활에서도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시원하지 않겠는가!

그래야 박새도 초가 안에 둥지를 틀기도 하고

지저귀지 않겠는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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