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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희 May 04. 2023

강진
사의재 9, 10, 11

화가의 심미안과 통찰력으로 본  <핵심 미술 이야기>

화가의 심미안과 통찰력으로 본

<핵심 미술 이야기>





답사

강진 - 사의재 9, 10, 11







토담집 특유의 냄새와 쾌적함


어려서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에는

서울 세검정 백사실 계곡 들어가는 언덕이 

온통 초가 마을 촌이었다.

백사실 계곡서 내려오는 물이

바위를 타고 비스듬히 흘러내리는 

폭포 왼쪽 중간에 작은 아버지 집이 있었다. 


초가집 마당은 채소를 길렀고

폭포 쪽 낮은 담장 위로는 

호박 덩굴이 있었으며 

모퉁이에는 뒷간이 있었고 

물은 폭포물을 길어다 썼다.

물을 길어다 써야 했기에 

작은 아버지는 쌀뜨물로 세수를 하셨다.




문간방 진흙 방바닥에는 

멍석이 깔려 있었으며

벽도 도배가 아닌 진흙 벽돌에 

진흙으로 발라져 있었다.

초가집의 벽에는 자그마한 창문이 나 있었는데

창문이 중간에 깊숙이 있으므로 

벽이 참 두껍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다.

작은 아버지께 벽을 쌓으려면 힘들 텐데 

벽이 왜 이렇게 두껍냐고 물어봤더니

그래야 방안이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시원하지 않겠냐고 하셨다.

그래서 초가집은 

다 벽이 그렇게 두꺼운 줄 알았다. 

한 일 미터 남짓 되었던 것 같다.

그러나 커서 답사 다니며 어느 초가집을 봐도

벽이 그렇게 두꺼운 초가는 본 적이 없다.




거의 토굴에 가까운 초가의 기억은

문간방의 불 때어진 진흙 냄새와

더운 여름에 석굴과는 또 다른 

묘한 쾌적함이 시원한 체험으로 남아 

내 삶과 예술의 원천이 되었다.

감수성이 살아있을 때 체험한 그런 경험은

살아가는데 모든 것의 잣대가 되어 

비교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는 것이다.

가장 좋은 것을 접해보지 못하면

기준이 없기에 

판별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고 본다.

그래서 어린이들에게

좋은 체험의 기회를 주고 볼 일이다.




사의재는 부엌 벽은 

일부 나무 판자벽과 황토와 돌로만 쌓여 있었고

집의 벽들은 황토와 회벽을 섞어 

단단하게 발라져 있었다.

부엌 벽은 참으로 인상적이었고 

옛 기억을 되살려 주었지만

얇은 방벽에는 기대를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기회가 되었을 때 

방에 들어나 가보자고 들어간 후에는 

생각이 달라졌다. 

어려서의 그 황토 초가의 냄새가 

나는 것이었다.

그때의 그 진한 냄새는 아니나

미미하게나마 

그 내음을 다시 맡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넋이 나가기에 충분했다.  


나만의 내부 고향은 

이미 순식간(瞬息間)에 거기 있었다.










부뚜막과 구들 문화


우리 것을 찾는 과정은 가려내는 과정이다.

역사가 긴 만큼 가려내기가 쉽지는 않다.

기준이 필요한데, 

기준은 가장 오래된 것일수록 

우리 것일 가능성이 높다. 

오래전에 가장 앞서 있던 문화가 

동이족 문화였기 때문이다.

'음양오행 사상'은 

그 대표적인 것 중의 하나이다.


음양은 양이 좋고 음이 나쁘다 

그런 단편적인 것이 아니다.

음과 양 다 동등한 가치를 부여했다.

환경에 있어 가장 음인 것은 물이고 

가장 양인 것은 불일 것이다.

우리 조상은 물이고, 불이고를 가리지 않고 

잘 다스리는 지혜가 있었다.

그래서 중국 고대서에서는 

치수를 동이족에게서 배워

나라를 안정시켰다고 나온다.

물만 잘 다스린 것이 아니라 

불 다루는 기술 또한 좋았다는 것은 

도자기 굽는 가마나 부뚜막 

그리고 대장간의 화로를 보면 알 수 있다.




불을 잘 다스리는 것은 

고대에는 쇠를 생산하는 고급 기술이었기에

국력과도 상징되는 일이었다.

비파형 동검, 민무늬토기, 고인돌을 통해 

고조선의 세력 범위를 추정할 수 있다.


특히 청동 거울의 뒤면 세공 기술은 

요즘도 제작이 불가능할 정도로 

세세한 잔 선 무늬로 이루어져 있다.

새긴 무늬는 고조선에서 쓰던 원. 방. 각도 새겼다.

선의 수 13,300개, 

선의 간격 0.0001밀리미터 오차가 없다.

2500년~3000년 전 이런 청동 거울을 만든 기술은

세계에서 오직 고조선 밖에 없다.

이어서 가야는 철을 다루는 기술로 

유지되던 나라이기도했다. 

고조선이나 가야는 

당시 최첨단 하이테크의 기술을 

가진 나라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 이전에 만주의 홍산 문명 시대의 옥 가공기술이 

고스란히 청동기 철기 기술로 이어졌다는 것이 

미술사학계의 주장이다.

옥은 가장 단단한 물질이기에 

요즘도 가공이 용이치 못하다.

현실적으로 얘기하자면 

그 당시가 지금보다 더 뛰어났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기에 한국의 미술사학계나 

미학계는 역사학계와 다르게 진실을 주장한다.

그들은 자료와 증거를 갖고 있으며 

논리도 있으며 또한 거짓되지 않고 양심적이다.

식민사관에 오염되지 않았기 때문이고

다행히도 밥줄과 관계가 없는 

전문 직책이었기 때문이리라.

한국 문화의 마지막 보루(堡壘)는 

미술사학계나 미학계이다.




전문적인 옥 가공 기술이나 

섬세한 청동기 제작 기술은 차치(且置)하더라도

온돌방 정도는 

우리의 상상으로 추론해 볼 수 있겠다.  


나무대로 다른 나무 한 점에 비벼 

마찰을 일으켜 불씨를 살려 

불 피우는 것은 가능하다. 

나무든 짚이든 솔가지든 탈 것만 있으면 된다.

그리고 물을 데우려면 돌 틈에다 불을 지피면 된다.

이제는 연기가 문제다. 

연기를 한쪽으로 뽑아내려면

나무 넣는 쪽과 연기 나가는 쪽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막는다.

그것이 '부뚜막'과 '굴뚝'이 된다.


부뚜막이란 말은 

'불을 두어 막은 곳'이란 뜻에서 유래되었지 싶다.

연기를 더 멀리 뽑아내려면

굴뚝을 가로로 길게 뽑으면 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돌구멍 길을 만들어야 한다.

고래를 길게 쌓아 '구들장'을 얹으니 

'구들'이 되었다.


구들이 길어지니 부뚜막에 불을 지펴도 

연기가 아궁이로 나온다.

연기가 긴 구들을 통과해 

굴뚝으로 잘 빠져나가게 하려면

어찌해야 하나 하고 연기를 연구하게 된다.

온기가 상승하는 성질이 있기에 

구들골의 밑바닥을 비탈지게 하면

연기가 위쪽으로 가므로 

연기를 굴뚝으로 유도할 수 있다.

그리하여 완성된 것이 이름하여 '쪽 구들'이다.





고구려 고분 벽화에 쪽 구들 부뚜막 그림이 보인다.

기다란 쪽 구들 부뚜막에서 

그 당시 난방의 생활상이 보인다.

좌식이 아닌 입식 생활이다.

신라 때는 경주에서 숯으로 난방을 했다 한다.

숯으로 난방을 했다는 것은 

방안에 화로를 놓고 잤다는 뜻이다.

지금도 일본 료칸에 가면 

다다미 방에 화로가 놓여 있다.

학계에서는 이것들은 다 부분 난방이라고 정의한다.


쪽 구들 위는 따뜻했다.

추운 날은 기다란 구들 위에서 자면 

따뜻하게 잘 수 있었다.

너도나도 그 자리를 차지하려 했다. 

부부가 자려면 좁았다.

쪽 구들에서 두 쪽 구들로 넓힌다.

애들을 낳으며 식구가 늘어나니 더 늘려야 했다.

아예 방의 바닥 전체에 구들을 놓게 된다.

이렇게 해서 '구들방'이 된 것이리라.


아궁이는 하나나 둘인데도 

온기가 오래가지 않는다.

온기를 보존하기 위해 방법을 써야 했다.

구들 앞과 뒤를 턱을 높여 

연기만 빠져나가고 열기가 새는 것을 막았다.

그래도 더 열기를 가두는 방법은 없을까?

이번에는 아예 구들 앞뒤로 바닥을 파서

열기를 더 가지고 있을 공간을 만들었다. 

그것을 '개자리'라고 한다.


이제 되었다. 연기는 잘 빠지고 

온기는 보존이 더 되어

방도 따뜻함이 전보다 더 오래간다.

구들방은 이제 따뜻한 돌방이 된 것이다.

'온돌방'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온돌 문화'는 다른 나라에는 없다.

온돌방은 온기가 상승하는 특성상 

바닥부터 난방이 되어

부분 난방보다 훨씬 효율적인 전체 난방이다.

신체도 아래쪽이 따뜻하면 

그 열기가 위로 올라가 몸에도 좋다.

몸에 한기가 들었거나 지져야 할 때 

부뚜막 신세를 안 져도 되게 되었다.


이제는 온돌이 좋은 것이 증명되어 

중국 아파트에도 많이 보급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방바닥에 몸을 지지는 의미와 

그 맛을 그들은 앞으로도 모를 것이다.

뜨거운 돌이나 물속에 들어가서 시원하다 하고 

뜨거운 국물을 떠먹으며 시원하다 하고 

감탄하는 민족은 우리밖에 없다.

그런 지지는 맛을 우리는 알기에 

우리의 '찜질방 문화'가 정착하게 되었다.

근래에 '찜질방 문화'는 

새로운 우리만의 한류 문화가 아닐 수 없다.




겨울에는 찜질방에서 한파를 이겨내고

여름에는 계곡으로 피서 간다.


우리 어려서는 더운 날 집에 오면 

제일 먼저 한 것이 '등목'이었다.

좀 갖춘 집은 펌프가 있었다. 

수돗물보다 펌프 물은 더 차가워서 부러웠다.

등목이란 말에 노하우가 숨겨져 있다.

선조들은 

사람의 체온을 관리하는 중추신경계는 

목 뒤에 있다는 것을 간파한 것이다.


쉽게 더위를 이기는 작은 지혜가 아닐 수 없다.

일하는 아저씨들이 목에 수건을 두르고 있는 것도

땀을 닦으려는 목적 외에 

찬물에 적셔서 목 뒤의 체온 스위치를 

낮추는 의도도 있었던 것이다.

들으면 쉽지만 

더운 날 막상 이것을 하고 있는 사람을 

요즘 보기 드물다.













조립의 실체, 마루


사의재 마루에 앉아 있다 보니

마룻바닥의 느낌이 편안하다.

쓰다듬다 보니 색이 오래된 맛은 아니다.


일산 서쪽 경계 수막산(심학산) 밑에서

농사지으며 쉬면서 이론을 정리하던 시절,

주변에 한옥들이 팔려 허물어 버려지고

다시 지어지는 것을 많이 목격했다.

그중에는 솜씨 있는 목수의 작품 같은

목재 전체가 자색이 도는 제대로 된 집도 있었다.

아까웠다.

살던 농가 창고가 넓었기에

백 년 된 한옥의 마루를 가져와

다시 조립한 후 그 위에서 살았었다.


버려진 구들장도 손쉽게 구할 수 있어서

아궁이와 쪽 구들을 만들어

부뚜막으로 쓴 시절도 있었다.

내가 만들었지만 입체 생활품이자

자연 소재 조각품 같은 느낌이었다.

낮에는 농사짓고 마당에서 불 피워

깨진 항아리로 이것저것 데워 먹고

저녁이면 부뚜막에 불 지펴 된장찌개 끓여 먹고

조립한 옛 마루에서 잠을 잤다.

새벽녘에는 짙푸른 장엄한 하늘을 보면서

밖으로 나와 푸른 잎과

파란 꽃(큰 개불알꽃) 위에 소변을 봤다.


논에 물을 대는 봄에는

온 동네가 호반의 농가로 바뀐다.

논둑길에 핀 나만의 나팔꽃이

어떻게 그리 연한 색을 내는지 감탄했다.

잊지 못하는 인생에 있어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폐기 처분하는 한옥에서 손쉽게 건질 것은

대청마루와 쪽마루이다.

나머지도 아깝긴 하지만

그걸 쌓아 두고 보관한다는 것은 거시기하다.

멀쩡한 마루는 인테리어 소품으로 인기가 있어서

사려면 골동품상에서 가격도 꽤 나간다.

그 마저도 이도 저도 아니면

눈물을 머금고 폐기장으로 보내기도 한다.


마루를 뜯고 조립해 보면

조선의 목재 술의 근간을 쉽게 알 수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각재를 썼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그건 현대인들의 한계이다.

통나무 한쪽만 켜서 판판하게 만들어 보로 쓰고

홈을 파서 그 사이사이에 널빤지를 끼워 넣었다.

보는

일종의 바닥에 누워있는 통나무라 생각하면 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한 면만 가공한 통나무 대라는 것이다.


우리 목재술의 뿌리가 이렇다면

배무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조선이 통나무에 판자를 맞추어

판옥선을 만들었다면,

일본 배는 일본의 판잣집 문화에서 보이는

나무 기둥을 반듯하게 썰어내고

얇은 판자로 만든 배일 테고...

조선의 판옥선은

그에 비할 것이 못 된다는 것을 근방 알 수 있다.

두 배가 부딪치면 어느 배가 깨지겠는가?

우리는 대포까지 장착했는데.

이순신 장군이 전략도 좋았지만,

전승의 바탕에는 이런 배경이 있지 않았을까?

그래서 선조 앞에서

"전하, 저희는 아직 13척의 배가 있습니다."라고

큰소리쳤던 것이 아닐까?




마루에 기름을 먹인다고 하나?

하여간 마감을 할 때,

재래식으로는 광목천에 삶은 콩을 담아 넣어서

쪼매어 계속 마루에 대고 몇 날 며칠을 문지른다.


콩보다는 호두 기름이 더 뛰어나다고

어디선가 들었다. 끈적이지도 않고...

맞는 말 같다.

프랑스인들도 부유층 아니면 모르는 것이

호두 기름 두른 살라드이다.

맛이 확연히 틀리다. 비싸서 그렇지.

최근에 청담동 SSG 쪽에서 수입해 파는

호두 기름을 발견했다. 좋은 세상이다.

비싸지만 제 값은 톡톡히 한다.

우리 속담이 이럴 때면 꼭 생각난다.

"물건을 모르면 돈을 더 줘라."


옻칠한 나무 아니고는 그 표면의 색으로

어느 정도 오래되었는지 대충은 알 수 있다.

그 멋의 품격도 시간의 정도에 따라 많이 다르다.

0.1밀리미터도 안 되는

그 얇은 표면의 색감이 주는 가치를 알면 

기겁할 일이다.

그런데 한옥을 구입한 사람은

새로 단장한다고 그걸 다 갈아내고 

새로 니스를 입힌다?

이해가 안 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홍대 앞에 유일하게 남아있던

큰 한옥 한 채도 식당으로 넘어가더니

그 홍색이 돌던 최고의 한옥이

하루아침에 잡것으로 바뀌어 버렸다.

그 집도 장사 안되면

언젠가는 헐려 빌딩 들어설 것이 뻔하다.

경제 이치에 한옥은 늘 밀려났으니까.

그래서 재력이 있는 사람들의 의식이

바뀌는 것이 시급하다.

유네스코는 각 나라의 문화재들만 지켜줄 뿐

그 이하는 속수무책이다.

우리의 피부는 당장 우리가

스스로 사포질 하지 말고

지켜야 하지 않겠는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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