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의 심미안과 통찰력으로 본 <핵심 미술 이야기>
화가의 심미안과 통찰력으로 본
<핵심 미술 이야기>
이제 구석쟁이에 있는 장독대를
어슬렁거릴 타임이다.
장독대 주변 아래에 진흙 바탕색 위에
이것이 뭐시여?
줄기가 사선으로 퍼진 가운데
선명히 붉은 야릇한 꽃이다.
생전 처음 보는 꽃이라도
당황할 내가 아닌데도
머릿속은 아련한 것이
뭔지 모를 상황에 봉착했다.
마치 동대문 밖 시장 카바레 골목에서
다이애나비를 마주쳤다고나 할까?
아니다. 70년대 말죽거리에서
땅 투기로 잘 나가는 카르멘과
맞닥뜨렸다는 것이 낫겠다.
하여간 이상야릇한 상황이라
내 멘털이 잠시 '적멸' 상태에 있어야 했다.
카르멘아, 니가 왜 거기 있는 거니?
너무 야물딱지잖아.
약간 튀기도 하는 듯했지만
은근히 초가집 전체의 격을 살려주고 있었다.
이름을 몰라서 초등학교 동창들에게 물어봤다.
'우단 동자꽃'이란다.
동자꽃 중 한 종류라 한다.
우단은 비단같이 부드럽지만
보푸라기가 있어 촉감이 폭신한 그런 거겠지.
한순간에 전복이 일어남은
이런 상황에 다름이 아니다.
그전까지의 사의재의 모든 관심과 재미가
한순간에 무효가 되고
그 위에 이 꽃이 자리 잡고 말았다.
내가 이럴 줄은 나도 몰랐다.
그만 느닷없이 사랑에 빠져버린 것이다.
어찌나 삽시간에 일어난 일인지라,
내 나이 몇이고 어쩌고도 따질 겨를도 없다.
사랑이란 그런 것이려니 해야지 별수 없다.
그다음부턴 우단 동자꽃을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아졌다.
도착증 초기 증상이 시작된 것이다.
좀 전에 입구에서 나를 반겨주었던
풍만한 푸르른 수국과
몸매는 늘씬한 꺽다리에
얼굴은 둥글 넙데데한 접시꽃과 같이
비교할 등급이 아닌데도
속에서는 자꾸 비교해 보고 있다.
각기 다른 매력이 있는 것이고
우단이는 많이 특별한 케이스라고
속을 달랬다.
사랑이란 그런 건가 보다.
이쯤 되면 대상에서
빨리 빠져나올 줄 알아야 한다.
대상을 통해 사랑을 느꼈건만
사랑이 온 자체는
대상 때문에 온 것이 아닌 줄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삶이 울고 짜게 된다.
1980년 방위 근무 기간에
신세계 백화점에 표찰 구입하러 나간 적이 있다.
백화점 홀 중앙 계단에서 어떤 두 아가씨가
계단을 얘기하며 내려오는데
너무도 우아했다.
그런 일이 벌어졌다. 첫사랑이었다.
그 이후로 세상은 흑백에서
칼라로 전환되어 보이기 시작했다.
난 그 아가씨에 집착했었고
어찌할 바를 모르는 나이었다.
그 사랑의 감정을 준 것이
그 아가씨라는 존재인 줄 착각했던 것이다.
몇 년을 허송세월 하며 알게 된 것은
첫사랑이라도
그 아가씨는 내가 생각했던
그런 여자 자체는 아니라는 것이다.
단지 그 아가씨를 통해
정황상 그런 일이 벌어졌던 것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내 혼자 만든 환상이었다.
사랑은 그래서 대상에 상관없이
줄 때 행복한 것이다.
대상은 늘 변화한다.
대상에 집착하면 늘 그 변화에 시달려야 한다.
그러나 사랑을 줄 때 행복하다는
속성을 파악하면 그런 일이 없어진다.
하느님도 사랑을 줄 때
환희가 왔기에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우리 또한 줄 때 행복해하면 된다.
사랑은 주고받는 거래 관계가 아니다.
받으려 하면 골치 아파진다.
하느님은 그냥 속성상 주는 것이
환희이기 때문에 주신 것이다.
받으려는 개념이 있으신 분이 아니다.
주기도 바쁜데 받을 시간 여력도 없으실 것이고
이미 매 순간 다 있으신 분일 테니까.
뉴스에서 본 일이 있다.
사형수들이 사형장에 끌려가는 도중,
죄수가 호송차에 타는 순간에 어머니를 본다.
사형수 아들은 큰 소리로 뻥을 치고 있고
어머니는 하염없이 기도를 하고 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 모습이다.
우단 동자를 떠 올리며 사랑하면 그게 다이다.
그 꽃은 시들고 다시 필 것이다. 또 시들 것이다.
내가 그 현상에 관여할 일말의 어떤 것도 없다.
단지 상상하고 사랑하고 행복하면 되는 것이다.
사의재 터는 생각 해 보면 볼수록
음의 터인 것 같다.
사의재 방 오른쪽 옆구리에
쪽문과 쪽마루가 있는 이유를 이제 알 것 같다.
그 문을 열면 창문처럼 앞에
동쪽 연못 연꽃이 보이고
그 넘어 바로 동네 우물이 보인다.
그렇게 큰 우물은 처음 본다.
조그만 네모난 애들 수영장 같다.
동네 아줌마들이 모이는 장소였을 것이다.
주모는 밥상을 딸인 표 씨 미망인에게
자꾸 들려 보냈다.
이런 터의 정황은
조선 최고의 학자의 마음을
요동치게 했을 것이다.
다산은 표 씨 미망인과의 사이에서
딸을 갖게 되고 나중에 책임을 안 졌다.
체면 때문에 사랑의 속성을 망각한 처사이다.
그는 서양 학문을 연구차 가톨릭을 공부하다가
사형은 면하고 유배 왔다는 말이 사실인 것 같다.
예수의 신도는 아니었다는 것을
이 대목에서 짐작할 수 있다.
동네 우물을 보고
처음 사의재 울에 발을 들여놓으면서
푹 꺼진 자리에 그것도 우물 근처에
둥근 연못이 있다는 것이 의아스러웠다.
옛날에 주막에 연꽃 피는 연못이 있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생소하다.
다산이 유배 온 후 혹은 후대에 팠을 것이다.
다산이 팠다면
선비로서 동쪽에 큰 우물을 지척에 두고도
또 연못을 팠다는 것인데...
양반의 거처에 있어야 할 연못에 대한
형식에 너무 집착했던 소치로 볼 수밖에 없다.
요즘 말로는 형식에 치우친 오버라고나 할까.
그로 인해 음 기운이
두 배로 머물다 가게 된 것이다.
서쪽에서는 표 여인이
삼시 세끼 밥상을 들고 들어오지요.
동쪽에는 두 음기운이 버티고 있지요.
처음에 마음 잡는 데 힘이 좀 들었겠다.
결과는 음기운 과다로
딸을 출생시키게 된 것이 아닐까?
조선 중종 때의 도학자 서경덕이
황진이에게 안 넘어간 것과 비교되어
서경덕이 더 대단하게 생각된다.
사의재 내부의 전시는
사람 사는 방이 아니라 생명감이 없다.
가끔 불이라도 좀 지펴줘야 할 텐데...
아궁이에 불 땐 흔적인 그을음이 없다.
다산이 저술했던 당시의 상황을 유추하고
상상하는 데 도움이 좀 되는 정도이다.
그래도 나름 최선을 다하느라
뭣 좀 가져다 놨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 1762~1836)의
대표 저서로는 일표이서(一表二書),
즉, ''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신서''가 있다.
법과 제도를 고치고 바꾸어
나라를 새롭게 만들자던 ''유표'',
현행법의 테두리 안에서라도
우리 백성들을 제대로 살 수 있게
해주기 위해 저작했다는 ''심서'',
재판에서 억울한 사람이 없기를 바래서
저술했다는 ''신서''이다.
다산이 유배와 처음 1년은
허송세월 했던 모양이다.
주모에게 잔소리를 먹고 정신 차려
사의재에서 후학을 양성하며
책들을 쓰기 시작한다.
저술 활동을 재개한 것이다.
사의재에서 쓴 책 중에 경세유표가 있다.
경세유표(經世遺表)는 무슨 뜻?
‘경학’은 유학 경전,
즉 육경(六經 : 詩 書 禮 樂 易 春秋)과
사서(四書 : 論語 孟子 大學 中庸)를
연구한 것이다.
그리고 ‘경세학’은 세상을 경영하기 위한 것이다.
경세유표는
'유언으로 쓴 국가경영을 위한 제도개혁안'이다.
군주에게 부지런(勤)함과 치밀함(密)을 요구했다.
그리고 관료체제를 비롯해
전 분야에 개혁을 제시했다.
다산이 꿈꾼 나라는
모두 함께 일하고,
모두 함께 벌고,
모두 함께 살아가는 복지국가이었다.
근신해야 할 유배 기간 중에
상세한 개혁을 주장한 책을 저술한 것이다.
조정입장에선 불온서적이다.
그 책은 다산 제자들에게 전해져
동학군들을 이끄는 전봉준과
김개남에게 흘러들어 간다.
그 후 동학군의 지침이 되어
동학혁명의 촉매제 역할을 하게 된다.
실학과 동학이 주장하는 이슈는 동일하다.
"사람은 평등하다."
"백성이 나라의 주인이다."
"토지를 균등하게 분작해야 한다."
당시 조선 상황은
봉건주의 토지 및 각종 제도 위에
무보수여야 하는 아관들이
백성의 피를 빨고 있었다.
관에서 착취와 횡포가 극에 달하자
땅 없는 백성들은 생존을 위해 들고일어났다.
대책 없는 상황이었다.
그전 조선 역사에 감히 없었던
큰 반란이자 민중 봉기가 동학혁명이다.
다급한 조정은 일본에 의뢰한다.
일본군 기관총 하나가
동학혁명군 2만을 즉살시키고 끝을 낸다.
국제 정세를 읽지 못한 조정은
그때 이미 일본에 왕권을
민중이 아닌 일본에 넘기는
빌미를 제공한 것이다.
비겁하기까지 한 처사였다.
정조도 음독시키고 다산도 유배 보내고
동학혁명군도 몰살시킨 주범은
왕권이 아닌 실권이었다.
이미 그 당시에 이미 왕권은
땅에 떨어져 회생불가였던 것이다.
경세유표는 주장한다.
" 이 나라는 털끝 하나인들
병들지 않은 게 없다.
지금 당장 개혁하지 않으면
나라는 반드시 망하고 말 것이다. "
예언 같은 강력한 문장이다.
다산은 정확히 시대 상황을 읽고 있었으며
대책까지 갖고 있었다.
하지만, 최고의 실학자의 한계도 보인다.
자본이 국력일 수 있고 위력을 발휘할 수 있고
빠르게 대처할 수 있는 것을 간과한 것이다.
개혁을 해도 망했을 거라 본다.
그 당시 상황으로 보자면,
스스로 자생적으로 감당할 상황이 아니었다.
개혁도 하고 자본도 끌어들였어야 했다.
서구 열강들이 통상 교섭을 위해
가톨릭을 앞세워 전파하고 안달일 때
정치적으로 그걸 이용했어야 했다.
적어도 급성장한 왜의 배경 정도는
탐구했어야 했던 것이다.
정조가 오래 살았어도
그 큰 국제 정세 속에서는
마찬가지였다고 본다.
실학도 국제 정세 앞에서는
소용없었다는 교훈이다.
국제정세는 그때 이미 서양 자본에 의해
좌지우지되었으니까.
지금도 마찬가지다.
세계 유일한
무에서 유의 기적을 일으킨 한국이지만
개혁할 것은 해야 한다.
취득세와 양도세가 터무니없이 비싸
대를 이어 기업을 할 수 없는 실정이다.
지금까지 그래서 각종 탈세와 비리로
점철되어 왔던 것이다.
이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비전이 없다.
세계 2위의 매출을 기록하는
스웨덴의 이케아는
양도세를 피해 스위스로 이전했고
스웨덴에서는 그 후 양도세제를 아예 없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역사의 큰 포물선은
올라가는 추세 선상에 있기에
한국이 다시 살아날 수 있는
시나리오는 있다고 본다.
예를 들어 세계의 큰손 유대 자본이
중국의 큰 시장과
거의 빈터로 방치되어 온 만주에서
한국을 끼고 한탕하고 싶다거나
미국의 자본이
한국에 그동안 투자해 이룩한
기술력을 바탕으로
슬슬 재투자해 이익을 뽑고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다거나...
우물 안에서 울어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나.
우리는 요즘 말로 일단 줄을 잘 서야 하는 것이다.
줄 선택을 잘하려면
의식이 깨어있는 수밖에 없다.
희망만은 잃지 말자!
이렇게 정리하니
사의재를 홀가분히 떠나올 수 있었다.
그래도 사의재의 소득이라면
초가 안의 황토 내음과
우단 동자꽃을 통한 사랑의 체험이었다.
사의재를 나오며 사의재 울타리 안에 같이 있는
동문주막에서 아욱국을 한 그릇 했다.
아니 원래대로라면
동문주막 안에 있는 사의재가 맞겠다.
동문이란 이름으로 보아
그쪽이 관가 동쪽 문 밖이었음을 알 수 있다.
아욱국은 바지락으로 우려낸 깔끔한 맛이었다.
계산하고 나오는데 주모가
뭔가 전문가 포스인데
관광과에 전화 좀 넣어달란다.
사의재 해설할 관리인 좀 상주시켜 달라고.
자기네 말은 듣지도 않는단다.
나도 주모말은 듣지 않는 똑같은 사람이다.
관광단지 공사를 하고 있으니
뭔 대책이 있을 것이라 다독이고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