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의 심미안과 통찰력으로 본 <핵심 미술 이야기>
화가의 심미안과 통찰력으로 본
<핵심 미술 이야기>
강진
고려청자박물관 3, 4
고려자기 색 분류
고려자기 이전의 도기 가마터에 가기 전에
고려자기에 대해 좀 더 짚고 넘어가야겠다.
고려자기를 만드는 바탕흙(태토)은
점성이 강하고 농밀한 진한 색이다.
입자가 진흙보다 곱고 찰져
자기를 얇게 만들 수 있고
표현을 세밀히 할 수가 있다.
자기를 빚은 후 유약을 칠한다.
사실 고려청자는 고려자기의 12세기 이후에
비색을 띤 자기를 의미하므로
고려자기 중 가장 인기 있는
빼어난 색감을 자랑해서 대표적인 것이지
고려자기가 다 청자는 아니다.
그래서 고려 시대 자기를 고려청자라
통틀어 말하는 것은 좀 그렇다.
고려자기의 여러 분류법이 있겠지만,
색채 전문가인 나는 색으로만 분류를 해보겠다.
청자의 컬러는
흙(태토)물과 잿물을 섞어 만든 유약이 낸다.
불 땔 때 가마에서
잿물의 철 성분이 산소와 얼마나 결합하느냐가
자기의 색이 정해진다.
1,100도부터 불구멍을 막고 때는데,
초목의 재에는 소량의 철분이 있어서
불구멍을 열고 때면
철분이 산소와 결합되어 엷은 황갈색을 띠고
불구멍을 닫고 때면
철분에 있는 그나마 산소마저 다 빼앗겨
엷은 녹청색을 띤다.
크게 계열별로 보자면,
갯벌색과 갈색과 비색(翡色)이다.
갯벌 색은
옅은 회색, 회녹색, 하늘색을 두른 갯벌 색.
비색은
담청색, 담녹색, 쑥색, 비취옥색.
갈색은
진갈색, 옅은 갈색으로 구분된다.
초기에는 도기 만들 때 쓰던 방식으로 해서
색들이 진했으나
본격적으로 청자 흙과 유약을 써서
정식 자기를 만들면서 돌연 색이 옅어졌다.
비색계열에서
담청색 > 쑥색 > 담녹색 > 비취색 > 옅은 비취색으로
이어지는 변화는 과히 확연하다.
대륙의 청자는 청색을 머금은 짙은 옥색이다.
옥을 보석으로 선호해서 이다.
생활 문화가 화려해지면 정점에는
밝고 고상한 중간색을 선호하게 되는데,
반도 고려 시대는 대륙보다 더 정점까지 갔음을
자기의 색으로 알 수 있다.
고려의 사대부와 귀족들이 선호한
옅은 비취색의 호사로움은
사치의 극치를 보인다.
공간감이 있는 백색의
조선 백자
그러다가 시대 상황에 따라
고려와 함께 고려자기가 쇠퇴하고
조선 초, 혼돈의 시대에
'분청사기'로 자유롭게 가더니
청화백자의 흐름을 타고 백자 시대로 들어선다.
백색은 사실 신의 색이다.
극치를 넘어 아예 신의 경지에서
살아가겠다는 거였다.
중국과 일본이 청화백자로
세계 무역을 크게 장악하고 있을 때
성리학자들의 그 참을 수 없는
고지식하고 답답한 결정 덕에
조선은 홀로 앞서서
현대에나 유행하게 된 순백자도 고집한다.
조선의 국제 정세나 무역보다는
왕권 유지와 사대부 양반들의
안일 추구의 핑곗거리로
성리학에만 집착한 산물이
백자 탄생의 원동력이라는 것은
참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결론은 조선의 운명은 쇠락했지만
덕분에 남겨진 것은 조선 백자인 셈이다.
조선 백자는 희게 보이지만
불구멍을 막고 때는
고려청자의 전통이 남아 있기에
은은하게 푸른 기가 도는 감이 있다.
요새 만드는 그냥 맹숭맹한 하얀 백자와는
차원을 달리한다.
조선 백자색에는 오묘한 공간감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으로 청자의 전통이
백자에도 남아있음을 눈치챌 수 있다.
그러나 요즘 백자는 옛 백자조차
재현 못 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누구도 그 얘기는 입에 담지 않고 있다.
유심히 조선 백자 색을 간파하거나
요즘 조선 시대 백자색과
비교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서이리라.
옛 조선 백자는 오래 보고 있어도 지루하지 않다.
그 백자색 안에서 마음껏 유영할 수 있다.
그러나
요즘 깨끗하기만 한 백자들은 그럴 수가 없다.
맨 벽을 보듯 답답하기 때문이다.
그나마 서양 화이트 그릇보다는 낫기는 하다만
그것으로 위안은 안 된다.
조선 백자의 백색은 그냥 하얀색이 아니다.
맑고 깊이와 공간감을 주는 빠져들 수 있는 색이다.
대륙에서는
오월국 때부터 청자를 만들어 왔고
반도 고려는 수입에 의존했지만
수요가 많아지면서
10세기 후반(974년)부터
자기를 자체 제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1세기 초 50년 만에
고려화된 작품을 만들어 내고
12~13세기에는 자주적이고
독창적인 삼강청자를 쏟아냈다.
이것이 우리 겨레가 가진 능력 아니겠는가!
우리도 이 시대에 그러한 일을 겪었다.
세계 최고의 전자 회사 소니를
삼성이 따라잡은 일 말이다.
젊어서 일본 소니나 아이와의 찬란한 워크맨을
쇼윈도로 군침을 흘리며 부러워했다.
내 생애에
우리나라가 그런 물건을 만드는 것이
불가능할 것만 같았는데...
현재의 K-pop이나 한류 드라마도
그러한 경우에 해당된다 하겠다.
이어서 미술 분야도
그런 일이 일어나지 말라는 법이 있겠는가 싶다.
세계 미술 시장의 한계가
우리 눈에 보이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청자 음각 연화문 매병 (靑磁陰刻蓮花文梅甁), 12세기 후반
청자 투각 주전자 받침대, 1208년, 담녹색 광택유약
청자 음각 앵무문 발
청자 상감 운학문 매병
고려자기를 지킨 이들
고려자기를 미학적으로
처음 다루기 시작한 인물은 고유섭 선생이다.
고유섭 선생을 여기 고려자기 얘기에서
다루는 것은 의미가 있는 일이다.
그가 많은 연구 논문을 써 놨지만,
생전에 출간한 유일한 책이 '고려청자'란 책이다.
우현 고유섭 선생은
조선 이후 근대에 들어
최초의 미학자이자 고미술사학자였다.
우리나라 미술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인데,
미술 하는 사람들 중에도 잘 모르는 사람이 많다.
그는 경성제대 미학과를 나왔고
개성부립박물관 관장을 지내며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지냈던 최순우를 키워냈고
역대 박물관장들을 지낸
김재원,김원룡,정양모,안휘준 등
쟁쟁한 인물들에게 영향을 많이 끼쳤다.
고유섭 선생은 인천 분인데
인천은 미술학자들이 많이 배출된 곳이다.
최순우와 절친이었으며
국립현대미술관장 지낸 바 있으신
이경성 선생도 인천 분이다.
이경성 선생님은 홍대 은사이셨기에
나와는 각별하셨던 분이다.
내게 한국 미학을 알게 해 준
홍용선 강사도 인천 분이다.
그들 모두
참 때 안 묻은 순수한 미술계 인사들이지.
고미술학과 미학 쪽이
일제강점기에 생겼으면서도
다른 분야에 비해 식민사관에 물들지 않고
소신을 지켜 올 수 있었던 것은
고유섭 선생의 역할이 컸다고 본다.
역사학회나 한글학회는 신민사관에 휘말려
돌이킬 수 없는 커다란 오점을 남긴 점과
아예 사라져 버린 전통문화들이 있는 것에 비하면
그야말로 기적 같은 일이다.
물론 일제강점기에
일본의 문화재 약탈의 횡포는
그야말로 가관이었지만
고미술학계와 미학 쪽은
학문적 손상이나 왜곡이 없었다.
문화재 수탈은
주한 특파 대사로서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한
이토 히로부미가
1906년에 초대 조선 통감으로서 우리나라에 와서
일본인들에게
"얼마든지 좋으니 고려청자를 가져오라." 했다.
그는 한국 고미술 예호가였던 것이다.
이를 간파하고 이완용은 고려자기 수집에 들어간다.
그리고 창덕궁에 이왕가 박물관을 건립하고
고려자기 6562점을 컬렉션 하고 전시회를 개최한다.
이것이 우리나라 도굴의 역사의 시작이요
골동품상이라는 돈 되는 새로운 직종의 탄생이다.
개성의 고려 무덤들은 파헤쳐지기 시작했고
대부분의 고려자기들이 일본으로 흘러 들어간다.
현재 도굴된 어림잡아 4만 점의 고려자기 중
일본에 2만 점과
한국에 2만 점 정도가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전시회에서 고종은 고려자기가
우리의 것인 줄도 몰랐다.
모르면 의도한 자에게 당하는 법이다.
그래서 의식이 중요하고 알아야 한다.
우리의 미감이
세계 최고의 가치가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하면
창작의 한계가 있을 것이고
알지 못하면 남의 손에 들어가게 된다.
이에 맞서 뒤늦게 그나마 지켜낸 이가 있다면
간송 전형필 선생이라 할 수 있겠다.
그가 의식 있는 예술품 수집가가 된 데에는
두 가지의 배경이 있다.
하나는,
조선 마지막 심미안의 소유자
위창 선생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간송이 휘문 고등학교 시절,
근대 최초의 서양 화가 고희동 선생이
휘문고의 미술 선생이었다.
고희동 선생의 소개로 위창 선생을 소개받은 것이다.
또 하나는,
광교 시장 일대를 소유한
커다란 수익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간송은 고려청자를 일본까지 직접 가서
일본에 살던 영국인 수집가에게
최대치의 가격에 사 왔다 한다.
고유섭 선생은 미학이라는 이론으로
전형필 선생은 예술품으로
한국의 후손들에게 큰 것을 남겼다.
그들의 업적은
현대 예술가들에게도 줏대 역할을 하고
방향을 잡는 데 도움이 된다.
고유섭 선생은 고려청자의 미를
'무심'이라는 장인 정신으로 정리했다.
무심은 단순하고 별거 아닌 것 말 같지만,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어
실행하기 쉽지 않다.
청자항, 12세기
청자 양각 포도당초동자문 대접, 연회녹색